[서울&] 본성적으로

‘숨’ Jaye 지영 윤

등록 : 2026-11-05 11:59 수정 : 2026-11-05 12:00
Life23. Sting, Mixed media on paper, 53×77㎝
커다란 두상, 둥그렇고 보송보송한 털, 뒤뚱뒤뚱 걸음새, 삐이― 높고 가느다란 소리.

얼마 전 혼자 놀며 본 다큐멘터리에서는 우리가 동물을 ‘귀엽다’고 인식하는 특징들과 아기를 연관 지어 설명했다. 모습이나 행동이 아기를 닮아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낀다는 거다. 본능이라니…. 저는 아기가 싫다며, 애가 울면 타고 있던 버스에서도 내린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누구였더라.

본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람의 본능 중에 최고는 아무래도 ‘노는’ 게 아닌가 한다. 믿거나 말거나, 컨설팅 회사 다닐 땐 아침 일곱 시에 나가 새벽 한두 시에 집에 와도 놀지 않으면 열심히 산 게 억울해서 잠을 못 잤다. 엄마가 졸린 눈으로 문을 빼꼼 열곤 “안 자? 빨리 자야지”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방해해서 지금부터 삼십 분 더 놀 거라고 쏘아붙이던 되먹지 못한 딸이 누군지는, 내가 잘 안다.

꾸준한 게 특기라 나는 요즘도 매일 자투리 시간이라도 가지고 노는데, 최근 들어 더욱, 혼자 노는 걸 좋아하게 된 듯하다.

늘 그랬던 건 아닌데…. 같이 놀자는 꾐에 한달음에 달려 나간 적도 있고,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초대한 파티에 가기도 했고, 경영대학원 유학 중엔 핼러윈 파티에도 갔다. 무려 스물아홉 살이 ‘포니테일’ 가발에 커다란 나비 날개 장식까지 달고 말이다. 아이고, 라고 생각한다면 이제 시작이다.

여기저기 거미줄과 해골 장식을 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와 술집에서 반 동기들과 그들의 배우자며 친구들을 만났다. 반 동기들은 번듯한 직장을 다니다 온 멀쩡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날만큼은 작정한 듯 뱀파이어, 바나나, 백조 달린 발레복 같은 걸 입고 나타났다.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논란이 있는 의상이 있는가 하면, 거꾸로 편견이 담긴 은어를 희화화해 병아리 인형을 잔뜩 붙인 자석 의상도 있었다. 상업의 힘과 놀이의 본능이 이루어낸 한마당이었던 성싶은데, 낯선 이들과도 서로의 꼴을 보며 함께 웃는 해방감을 느낀 경험이었던 듯하다. 2002년 월드컵 때 온 국민이 그랬듯 말이다.

단 한 번 가본 핼러윈 파티가 기억난 건 며칠 전 보라색 리본을 받았기 때문이다. 분홍 리본, 노랑 리본은 알아도 이태원 참사 리본이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세월호 때 노란 리본을 만들던 사람들이 이태원 참사를 보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 끝에 보라 리본을 만들기 시작했단다. 내 가족 챙기는 일도 꾸준하기가 어려운데, 생면부지의 남을 위한 활동을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왔다고? 리본을 준 이가 궁금해져 말을 붙였다.

“가만히 있으면 잊힐 것 같아서요.”

인권 단체에서 삼십 년간 활동했다는 그는 책임 묻는 일을 계속하는 건 인생을 의미 있게 살고 싶어서인 것 같다고 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부연했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대화를 되짚어보니 어쩌면 ‘귀여운 것’만이 우리의 보호 본능을 깨우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본 적도 없는 이를 기억하려 하고, 만나지도 못할 미래까지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은 무엇으로 설명하겠는가 말이다.

다음날인가, 미디어에서 10월29일에 관한 기사가 하나둘씩 올라오기에 보라 리본에 대해 다시 찾아보았다. 몇 년 전의 기사가 있었는데, 리본을 만들던 손은 장인의 경지에 올랐으며, 그걸 만드는 자리에는 일상적 대화와 웃음도 오간단다.

리본을 나눠준 그가 그걸 직접 만들기도 했는지 문득 궁금했다. 희생된 분 중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라고 했는데….

자그마한 보라 리본 키링을 어디에 달까, 가방을 고르다가 도로 소품 선반에 놓아두었다. 약속 같은 웃음을 입은 노란 리본이 보라 리본에 건넨 마음을 내가 버젓이 달아도 되나 싶어서.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