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친구의 도리

‘숨’ Jaye 지영 윤

등록 : 2026-08-13 11:02
Life20. Watching, mixed media on paper, 54.5×75㎝

살면서 좋은 일만 맞이할 수는 없겠거니와, 난데없이 집채만 한 일이 덮치기도 한다. 비유나 농담이 아니고 진짜 집 한 채 말이다.

혼자가 되신 친구의 어머니는 서울의 아파트 판 돈을 ‘보이스피싱’으로 고스란히 잃었다. 스마트폰으로 못하는 게 없는 똑 부러진 ‘신노년’인데다, 일상을 세심하게 살피는 자식들도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당했을까 싶지만, 그랬다.

검찰 사칭 범죄 조직의 집요한 압박에 속절없이 당한 후, 뒤늦은 신고며 소송 끝에 그저 개인이 조심해야 한다는 깨달음만 남았다고. 동전 한 푼 되찾지 못했지만, 상황이 종료되니 몇 년 만에 잠을 다시 편히 잔다며 친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 모두 나라면 그렇게 털고 잊어버리지 못할 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친구로 둔 줄을 모르고, 십몇 년간 내가 고객인 기업에서 연락이 왔다. 일이 년에 한 번씩 담당자가 바뀌었다며 오는 인사성 문자였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십여 년 유사한 일을 해본 탓인지 무심코 들여다본 문자에서 어라? 이러면 안 될 텐데 싶은 게 눈에 들어왔다. 콜센터에 전화하니 본사 확인 후 연락을 주겠단다. 몇 번을 엇갈리면서도 애써 나를 찾은 친절한 목소리가 본사의 답변을 전했는데 뜻밖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식 아닌가.

친구 어머니 사례까지 들어 이건 고객을 잠재적 위험에 방치하는 것일 수 있다고 알리니, 회사 민원으로 접수하겠느냐 물었다. 부서가 바뀌어도 답변이 비슷할 성싶고, 업계 관행일지도 모른다 싶어 공기관 민원을 작성했다. 다만, 회사에는 익명 처리되는 민원으로….


분명 익명으로 해달라고 했건만, 며칠 후 해당 회사의 담당 부서에서 연락이 왔다. 공기관이 회사에다 내게 직접 해명할 기회를 줬다며, 잠재적 위험을 알고 있기에 그동안 교육을 시행해왔고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젝트도 있단다.

알려줘서 고맙다, 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담당자는 조심조심 말을 이어갔다. 민원 취하 고려, 내 시간에 대한 보상성 사은품, 담당 직원 교육 약속 같은 이야기가 머뭇거리며 나왔다. 사은품이라니, 무슨 개인 간 갈등도 아니고 화해가 필요한 사안이 아닌데.

말하는 사람도 난처해, 듣는 나는 더 난처해, 왜 이런 대화를 하게 된 건지 손에 잡힐 듯했다. 나도 모르게 불쑥, 회사를 대리해 사과하고 설득하는 업무라 힘드시겠다고 위로를 건넸다. 평소에는 잠재워두는 제정신이 슬쩍 입을 열었다.

시키겠다는 교육은 콜센터 직원보다는 본사 담당자가 받아야 할 몫이지만 시스템과 경영의 문제가 더 크니 그 직원이 억울할 마음도 헤아려주시라고. 그러자 오지랖이 자기도 입이 있다며 한술 더 떴다. 민원 취하는 내가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알 수도, 아는 게 적절하지도 않은데 무작정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기관에 나와의 통화 내용을 공유하고 앞으로는 그쪽에만 보고하는 게 맞을 성싶고, 나야 일이 년 후 담당자가 바뀌었다고 연락이 또 올 테니 그걸 보면 알 일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이로써 내 할 바를 분명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공기관으로부터 답변서가 왔다. 내 민원은 기업의 내부 운영 문제라 기업의 담당 부서로 보냈단다. 그러고서는 아이고야, 자체 시정조치 후 결과를 공기관과 내게 알릴 담당자라며 이름과 전화번호를 굳이 알렸다. 아마도 나랑 통화한 사람일 테다. 문득 여러 사람 골치 아프겠다 싶어 미안해졌다. 쓸데없는 궁금증이 올라와 회사 대표는 누구인고, 찾아보니 한두 다리 건너서도 알 만한 이는 아니었다. 내가 뭐라고, 하는 생각이 스쳤다.

뭐긴, 보이스피싱으로 집 한 채를 ‘날린’ 어머니를 둔 사람의 친구지… 그렇다면 나는 누구겠는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볼 사람?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