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4년 동안 잠자던 주민자치가 깨어난다
초점& 서대문구 새 구청장 ‘결재 1호’ 주민자치회 올 11월 부활
등록 : 2026-08-13 10:48 수정 : 2026-08-13 10:49
지난 11일 박운기 서대문구청장이 서대문구 남가좌동 디엠시(DMC)파크뷰자이2단지 경로당을 방문해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서대문구 제공
동별로 50여 명 자치위원 모집 중
주민추천 동장제 시범 운영 추진도 서대문구(구청장 박운기)의 주민자치 시계가 다시 돌기 시작한다. 2018년 시범사업으로 출발했다가 2022년 말 서울시 예산 지원 중단 뒤 구 자체 인건비 예산 확보가 불발되며 4년의 긴 공백을 겪은 끝에 재개를 준비하고 있다. 박운기 서대문구청장은 지난 7월1일 취임 첫날 ‘주민자치회 활성화 추진 계획’을 행정 결재 제1호로 서명했다. 박 구청장은 “단순 부활이 아닌 활성화를 통해 서울에서 주민자치가 제일 앞서가는 자치구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당장 초점은 단기 실적보다 자치의 ‘정상화’에 있다. 공백기에 잊혔던 민주적 숙의와 절차를 주민들이 일상에서 수행해보는 ‘연습의 장’을 제공한다는 로드맵이다. 그러나 주민자치 제도 이면에는 지난 수년간 현장에서 축적된 제도적 피로감과 한계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자치의 정상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현실적인 진단과 조율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재밌게 놀았지만 내 돈 썼다”…실무자의 고백
서대문구와 달리 구 예산을 편성해 주민자치 제도를 유지해온 다른 자치구 주민자치회 한 관계자의 고백은 현행 풀뿌리 자치제도가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관계자는 “주민들만의 결정에 따라 주민자치 사업이 진행되긴 하지만 사업 예산이 연간 5천만원 안팎에 불과해 주민들이 기획한 행사 등을 하며 재밌었다 정도의 만족감에 그친다”고 털어놨다. 그는 나아가 “기초단체장의 ‘유권자 관리’(표밭 관리) 무대로 흐르기 쉽다”며 “지역 행사를 찾아 주민 손을 잡는 단체장의 행보 속에서 자치회가 사실상 선거 텃밭 관리 조직처럼 작동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문제는 위원들의 회의 수당보다 실제 지출이 더 많아 위원들이 사비를 털어 넣기도 한다는 점이다. 시간과 자금 여유가 있는 동네 유지 위주로 주민자치가 쏠리게 되는 배경이다.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는 학계와 연구기관의 진단과도 궤를 같이한다. 수원시정연구원 정재진 도시경영연구실 연구위원은 정책 보고서 ‘주민참여예산제도의 실효성 제고 방안’에서 “관으로부터 이식된 제도 도입은 시민 참여의 효능감을 저하시키고 소수가 독점하기 쉽다”고 진단했다. 하혜영 국회입법조사처 행정안전팀 입법조사관 역시 보고서 ‘주민자치회 설치·운영 현황 및 향후 개선과제’에서 “주민자치회가 지자체 지원금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행정의 하부기관으로 머물 수 있어 자율성 확보를 위한 자주재원 확보 방안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내부 역할 둘러싼 이견과 고령화된 회의실 주민자치 현장에는 조직 내부가 안고 있는 두 가지 약점도 상존한다. 첫째는 구청이 채용해 각 동 주민자치회에 파견한 지원관과 주민 간사의 각자 역할에 대한 이견이다. 이에 대해 한 주민자치회 전직 관계자는 “지원관은 공무원이라 생각하며 수동적이기 쉽고, 간사는 온갖 실무를 도맡아 하다보면 서로 협업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기 쉬운 구조”라고 설명했다. 둘째는 100% 무작위 추첨제가 초래하는 ‘회의실의 경로당화’다. 각 동 자치위원 50여 명 중 대다수가 65살 이상 고령층으로 채워지며 젊은층이 의욕적으로 참여하다가도 결국 이탈하기 쉬운 것이 현실이다. 공무원들에게도 주민자치회는 대민 스트레스라는 현실적 고충이 있는 탓에 기피 부서가 되기 쉽다. 자치회 활성화 이면에 도사린 담당 공무원들의 격무와 스트레스 역시 풀뿌리 민주주의가 해결해야 할 그늘이다. ‘수평적 소통’ 내세운 구청, 행정의 방어막 될까 서대문구는 이런 현장의 어려움을 고려해 행정이 요구하는 일방적 희생을 방지하는 전향적인 예방책을 추진할 예정이다. 박운기 구청장 스스로 “권위를 내려놓고 공무원들에게 지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수평적 파트너십을 약속한 데 이어 악성 민원에 대해 직원들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적극적인 대처도 하라”고 주문했다. “주민자치의 본질은 관과 주민이 서로를 대등한 파트너로 존중하는 데 있다”는 지자체장의 행정 철학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구현될지는 앞으로 지켜볼 대목이다. 마침내 오는 10월15일 주민자치회의 명확한 설치·운영과 행정·재정적 지원 근거를 명시한 ‘개정 지방자치법’이 본격 시행된다. 그동안 시범사업에 그쳐온 주민자치회가 일반법 체계 속에서 정당한 ‘동네 정부’로 격상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대격변 속에서 부활하는 ‘서대문형 주민자치회’는 과거의 폐단과 타 자치구의 실패 사례를 흡수했다. 우선 공개모집(70%)과 지역 추천 위원(30% 미만) 제도를 혼합해 대표성과 전문성의 균형을 꾀했다. 또한 주민들이 직접 동장을 선택하는 선진적인 ‘주민추천 동장제’ 시범 운영을 위해 주민자치회 소관 업무 중 특정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특별위원회’ 규정을 조례에 명문화했다. 이는 실제 자치구에서 구성하는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서 선제적이라는 평이다. 조례 개정이 모든 난제를 단숨에 해결해주진 않겠지만 현장의 회의론과 진통을 축소하며 제도를 안착시키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다. 유재원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지방자치의 발달 과정에서 협치와 연대를 구축하는 동안 갈등은 상존한다”며 “이는 지방자치의 역사가 짧다보니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자 성장통”이라고 짚었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서대문구 주민자치회는 첫걸음을 떼기 위해 지난 6일부터 동마다 50명의 자치위원 모집에 들어갔다. 오는 9월7일까지 위원 모집을 마무리하고 11월 동별 주민자치회로 정식으로 출범할 예정이다. 이들은 임기 2년 동안 지역 의제 발굴, 자치 계획 수립, 주민 참여 예산 제안, 주민총회 개최 등 활동에 들어간다. 단순히 보조금을 소모하는 하부 단체를 넘어 주민 스스로 동네의 운명을 조율하는 ‘자립적 거버넌스’로 안착할 수 있도록 세심한 행정적 지원과 현장이 들려준 경고음들을 정밀한 나침반으로 삼아야 할 시점이다. 하변길 기자 seoul0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