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 가지 허기를 채운 금천의 큰언니”

초점& 금천의 척박한 땅에 살구꽃 피워낸 고 김주숙(1941~2026) 추모 전시회

등록 : 2026-06-05 11:21
2014년 효령상 시상식 모습. 금천구 공동체경제통합지원센터 제공

공동체보다는 각자도생이 더 익숙해지는 시대에 연대와 돌봄의 가치를 되묻게 하는 한 어른의 삶이 있다. 상아탑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서울 금천의 척박한 골목으로 스며들어 스스로 풀뿌리가 된 실천적 지식인, 고 김주숙 선생이다. 오랜 기간 병환에 시달리다 지난 1월 별세한 선생을 기리는 기획전 ‘마음의 꽃밭을 가꾸다. 큰언니, 김주숙’이 오는 10일부터 8월28일까지 열린다.

전시회가 열릴 장소인 금천구 공동체경제통합지원센터를 지난 29일 미리 찾았다. 전시 준비에 바쁜 곽사현 지원센터 주무관과 박은실 살구여성회 회장의 목소리에서는 고인에 대한 짙은 그리움과 존경이 물씬 묻어났다. 전시 실무를 책임진 곽 주무관은 고인을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 없는 청년 세대임에도 수많은 기록과 증언을 통해 그의 삶에 깊이 매료됐다고 고백했다. “선생님은 타인의 삶을 나와 연결된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이웃의 성장을 도우셨더라고요. 살면서 이런 어른을 한 번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진짜 행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학교수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졌던 그가 어떻게 16평짜리 지하실에서 지역사회의 ‘큰언니’로 불리게 됐을까.

혹독한 가난 속에서 배운 연대, 11평 시민아파트의 ‘실질적 가장'

194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김주숙 선생은 이화여대 진학 후 농촌계몽대 활동에 참여하며 사회에 눈을 떴다. 1968년 학생운동가 이우재와 결혼한 뒤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맞고 견디는 과정이었다. 통혁당 사건과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남편이 구속되는 등 깊은 시련을 겪으며 그는 연좌제의 굴레 속에서 4남매의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던 ‘실질적 가장'이었다.

11평짜리 시민아파트에 살며 누더기를 기워 입고 노점상까지 나서야 했던 고단한 시절이었지만, 그는 어려운 형편에 놓인 이웃들과 부대끼며 짙은 연대감을 배웠다. 전시회를 위해 미리 녹화한 영상 인터뷰에 담긴 둘째 아들 이동씨의 회고에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김주숙 선생의 강인함이 잘 드러난다. “어릴 때 집에 정말 먹을 것조차 없이 막막할 때였어요. 어머니가 전 재산을 털어 피아노 한 대를 사주시더니 ‘생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는 피아노 치고 놀아라' 하시고는 노점상을 하러 나가셨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이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죠.” 고달팠던 시절을 겪어낸 경험은 생전 그가 늘 강조했던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는 치열한 철학으로 굳어졌다.

세 가지 허기를 채워준 금천의 큰언니, 소탈한 ‘호호 아줌마'


1983년 구로구 독산동에 정착한 김주숙 선생은 사비를 털어 시흥본동에 16평짜리 지하방을 얻고 ‘살구여성회'를 창립했다. 살구는 ‘살기 좋은 구로’란 뜻이었다.

박은실 회장은 상아탑의 지식을 현장에서 실천한 선생의 헌신을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에 비유했다. 여성들의 배움에 대한 허기, 방치된 아이들의 돌봄에 대한 허기, 어르신들의 끼니에 대한 허기 등 이웃의 세 가지 배고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선생님은 대학교수의 권위 대신 스스로를 ‘호호 아줌마’라 부르며 이웃 곁에 소탈하게 머무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배움이 짧아 주눅 들어 있던 가난한 여성들에게 그는 단순한 강사를 넘어 삶의 존엄을 일깨우는 스승이었다. 녹화 영상 인터뷰에서 살구여성회 1기 유인숙 전 회장은 그를 이렇게 회고했다. “저희가 대부분 공부를 하러 가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기가 죽어 있는 건 사실이었어요. 그때마다 선생님은 ‘현재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라'라고 늘 용기를 주셨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30년 헌신이 남긴 숭고함의 유산

김주숙 선생의 헌신은 살구여성회에만 머물지 않았다. 선생과 살구여성회는 먹거리 운동인 ‘한우물아이쿱생협’, 어머니들의 독서모임에서 출발한 ‘함박웃음’, 생태환경 모임인 ‘금천생태포럼’, 무료 경로 급식소 ‘따뜻한 밥집' 등 지역 내 다양한 풀뿌리 공동체 설립에 든든한 모태 역할을 하며 마을 운동의 지평을 넓혔다.

선생의 곁을 지켰던 제자 우영화씨는 영상 인터뷰에서 “선생님은 10년 된 옷도 수선해서 입으실 만큼 본인에게는 엄격하고 검소하셨지만, 어려운 이웃에게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셨다”고 증언했다.

이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숭고한 헌신은 지역사회를 넘어 국가적 울림이 됐다. 2007년 서울특별시여성상 대상을 시작으로 2012년 김만덕상, 2014년 효령상 사회봉사부문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18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2011년 시작된 대장암 투병 생활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늘 더 나은 사회를 향해 있었다. 박은실 회장은 지난해 병상에 있던 김 선생과의 통화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살구여성회를 이끌어야 할까요?' 여쭤보면, ‘괜찮아요. 문 닫아도 돼요. 한 단체를 30년쯤 했으면 문 닫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으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세요'라고 하실 만큼 초연하셨습니다.” 단체의 권력화나 개인의 치적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만 집중했던 삶이었다.

박 회장은 “선생님이 보여주신 삶은 ‘숭고함' 그 자체였습니다. 설령 살구여성회가 훗날 문을 닫는다 하더라도, 이런 분이 우리 곁에 살았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라며 묵직한 당부를 남겼다.

하변길 기자 seoul0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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