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서울&] ‘만해’의 질문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창작 뮤지컬 ‘심우’, 시공간 넘는 역사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
성북구, ‘님의 침묵’ 발간 100주년 맞아 풍성한 프로그램 준비도
등록 : 2026-06-05 10:40 수정 : 2026-06-05 11:25
1937년 봄 성북동 ‘만해’의 집(심우장) 앞마당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2014년부터 해마다 현충일을 맞아 펼쳐지는 뮤지컬 ‘심우’(감독 차지성)의 공연 모습. 성북문화원 제공
[제자1, 2] 그러니 더욱 어려운 것 아닙니까. 김동삼 선생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만으로 총독부의 조사를 받기 시작할 겁니다. 그들을 끌어내려는 수작입니다. 뻔히 알고 있는 함정으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만해] 한 나라의 큰 별이 떨어졌는데
한 사람도 안아줄 사람이 없네
한 영웅의 죽음 앞에서
한없이 불안한 마음들뿐이네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이렇게도 낯설어 보일 수 있을까?
두려움에 갇혀 떨리는 불안한 눈동자
무엇이 이들의 믿음을 꺾었나 뮤지컬 ‘심우’(감독 차지성)는 1937년 중국 하얼빈에서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순국한 김동삼 지사의 주검을 수습해 장례를 치른 일화를 소개한다. 일제의 억압과 감시 속에 김 지사의 주검을 경성형무소에서 만해의 집(심우장, 성북로29길 24)으로 모시는 문제를 두고 제자들이 보인 상반된 입장과 만해의 의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만해가 남쪽의 조선총독부 청사를 바라보지 않겠다며 북향으로 틀어 지은 ‘심우장’(尋牛莊)은 역설적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에 적절한 ‘요새’와 같았다. 백외준 성북문화원 연구부장은 “당시 성북동은 골짜기가 깊고 인가가 드문 외진 곳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으면서도 도심과의 접근성이 좋아 독립운동가와 학생, 지식인들이 거주하거나 은밀히 모이고 활동했다”며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는 심우장의 단골손님이었고 국학자 정인보와 만해의 사상에 감명받은 젊은 청년들과 비밀 불교 단체의 당원들도 심우장을 아지트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심우장은 벽산 김적음과 박광 등 지인들의 도움으로 건축됐다. 만해는 이곳에서 문학 활동과 민족지사들과의 교류를 이어가다 1944년 6월 안타깝게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입적했다. 만해가 세상을 떠난 후 심우장에는 유족인 부인 유숙원 여사와 딸 한영숙 여사가 남겨져 슬픔과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견뎌야 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유족들이 피란길에 올라 심우장은 한동안 비어 있었다. 이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유족들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심우장을 팔려고도 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만해 선사의 독립 정신을 기려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면서 심우장은 개인의 주택을 넘어 국가적 유산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이후 지방문화재인 ‘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공식 지정돼 법적인 보호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이후 심우장은 역사적 가치를 전 국민적으로 공유해야 한다는 청원에 힘입어 2019년 국가 사적 제550호로 승격됐다. 현재 심우장의 공식 소유자이자 관리 단체는 성북구다. 구 관계자는 “성북구는 해마다 만해의 기일인 6월29일이 되면 재단법인 선학원, 성북문화원, 그리고 유족들이 함께 모여 심우장 마당에서 추모다례를 봉행하고 있다”며 “성북동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탐방지로서 국가의 체계적인 예산과 보호 아래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고 밝혔다. 구는 2013년 성북동이 서울시 역사문화지구단위계획 구역으로 지정됨에 따라 성북문화원과 역사문화자원 심층 조사연구와 콘텐츠 사업을 활발하게 수행해왔다. 창작 뮤지컬 ‘심우’는 성북문화원과 극단 더늠이 주도하고 성북구가 적극 지원하면서 공간과 시간을 넘어 무대 위의 예술로 다시 태어났다. 구 관계자는 “성북문화원의 제안으로 성북구에 뿌리를 둔 극단이 중심이 돼 뮤지컬 ‘심우’를 창작했고 2014년 심우장 마당 무대에서 초연했다”며 “이듬해부터 국가보훈부가 민간단체 주관 기념행사로 선정해 후원하고 성북구가 예산과 경비를 지원하며 매년 6월 무료 공연을 이어왔다. 특히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2019년에는 서울 시내 주요 공연장과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야외무대 등에서 초청 공연을 하는 등 성북구라는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올해도 현충일을 맞아 오는 6일과 7일로 나눠 심우장에서 모두 3회 무료 공연한다.
백외준 성북문화원 연구부장(왼쪽)과 차지성 극단 더늠 감독이 심우장 입구에서 활짝 웃고 있다. 이동구 기자
당시 재현한 것이 주효” 심우장에서 만난 차지성 감독은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독립운동가가 했던 일을 소재로 만든 공연 콘텐츠는 ‘심우’가 유일하다”며 “심우장이 그냥 쉬는 곳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니 이를 배경으로 사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보면 어떨까라고 생각했다”며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심우’의 특징에 대해 그는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서 그때를 재현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관객이 가장 감동한 부분도 바로 실제 사건 현장에서 당시 사건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공연을 보신 분들은 다음해에 다른 분을 모시고 또 공연을 보러 오신다”고 했다. 하지만 예년에 비해 올해 공연 횟수는 오히려 줄었다. 관객의 관심과 참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음에도 운영 예산에는 한계가 있어 공연 규모를 확대하기 어려운 탓이다. 차 감독은 “‘심우’가 지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한 만큼 앞으로 더 많은 시민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심우’의 각본을 쓰고 무대를 진두지휘한 차 감독은 거창한 영웅의 연대기보다 시대의 아픔에 맞섰던 인물들의 내면과 소시민의 삶을 따뜻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온 중견 연출가다. 지역 극단인 ‘홍성무대’의 창단 멤버로 연극 인생을 시작해 극단 ‘가교’에서 3년여간 실력을 쌓았고, 이후 극단 ‘동숭무대’에서 탄탄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극단 ‘더늠’을 창단했다. 주요 연출작으로 ‘쇠점터’ ‘아나키스트의 아내’ ‘죽음과 소녀’ 등이 있다. 성북구는 올해 만해 한용운 선사의 숭고한 독립 정신과 문학 사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기관들과 손잡고 추모 사업을 전방위로 전개한다. 심우장을 중심으로 다례재와 예술제, 학술 토론회, 야행 프로그램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연중 펼칠 계획이다. 뮤지컬 ‘심우’에 이어 만해가 입적한 날인 6월29일 심우장 마당에서 ‘만해 한용운 추모 다례재’가 봉행된다. 만해 탄생일인 8월29일에는 사단법인 만해사상실천연합 주최·주관으로 ‘만해 탄생 기념 만해평화문학축전’이, 같은 날 심우장에서는 ‘만해사상 심포지엄’ ‘만해 문학 향연’이 차례로 진행된다. 9월 중에는 ‘만해 한용운 추모 예술제’가 열릴 예정이다. 이어 10월 중에는 한성대 역사콘텐츠트랙과 힘을 모아 ‘만해 한용운·독립운동 콘텐츠 활용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심우장과 만해산책공원 등지에서 만해를 비롯한 성북동 대표 독립운동가, 문인들의 발자취를 체험할 수 있다. 구 관계자는 “특히 올해는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발간 100주년이 된다”며 “시집의 궤적을 한눈에 조망하는 아카이브 특별전 개최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전시에서는 1926년 초판부터 2026년까지 발행된 다양한 판본 중 100권을 엄선해 디지털 매체를 활용해 ‘읽는 시집’에서 ‘경험하는 콘텐츠’로 확장을 시도한다. 지난 5월12일 만해기념관을 시작으로 6월 시인의 고향 홍성 홍주성역사관, 8월 창작의 산실인 인제 한국시집박물관, 9월 말년의 흔적이 남은 성북근현대문학관까지 순회 전시에 들어간다. 이어 10월에는 전문 학자들이 참여하는 학술세미나도 진행될 예정이다. 성북구의 대표 역사 콘텐츠로 자리 잡은 뮤지컬 ‘심우’. 죽음과 투옥의 공포가 일상이 된 시대에 돌아간 이의 뜻을 이어받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몸부림친 인물들의 성찰과 연대는 관객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심우’가 단순한 역사극 이상의 시대적 거울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누적 관객 수 1700만 명을 향해 가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엄흥도와 충신들, 그리고 뮤지컬 ‘심우’에서 만해의 뜻을 잇고자 했던 동지들의 행동은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거대한 주제로 수렴된다. 그것은 바로 ‘기억하는 자가 존재하는 한, 죽은 이의 뜻은 소멸하지 않으며, 그 기억은 반드시 행동을 통해 완성된다’는 진리다. 이동구 기자 donggu@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