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무조건 학교에 갔어”
사람& 가방 대신 주걱 쥐고 5남매 키워낸 80대 조오남 어르신…도전 2년 만에 초등 과정 졸업장
등록 : 2026-02-26 12:06
지난 20일 자택에서 서울&을 만난 조오남 어르신이 환하게 웃고 있다.
“미도에서는 17년 일했는데 큰 월급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집 아니면 죽을 줄 알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했어. 반찬도 만들고 김치도 담갔지. 배추쌈이 나오면 질긴 껍질은 다 걷어내고 정성껏 반찬을 만들었지. 그 덕에 반찬 맛이 좋다는 평도 들었고.” 그는 무릎 연골이 다 닳아 양쪽 다리를 수술하면서도 식당 일용직을 다니며 거친 세월을 버텨냈다. 배움 대신 가족을 지켜낸 거룩한 ‘살림' 미도에서 나온 뒤에도 일흔이 넘도록 광주에서 식당 ‘날일’(일용직)을 놓지 않았다. “애들이 내가 광주에 있으면 자꾸 밥 먹고 일하러만 다닌다고, 안 된다고 서울로 오라 해서 10년 전 여기 관악구로 왔어. 얼른 내려와서 일 좀 해달라고 광주에서 한동안 전화가 왔었지.” 보다 못한 자녀들의 만류로 서울로 모셔온 뒤에야 비로소 어르신의 기나긴 주방 생활도 끝났다. 어릴 적 농사일부터 광주 일식집 주방을 지켰던 시간까지 어르신의 평생은 줄곧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일로 꽉 채워져 있었다. 홀로 다섯 남매를 건사해야 했던 어머니에게, 그것은 벼랑 끝에 선 가족의 생명을 온몸으로 지켜낸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살림’이었다. 자녀 다섯 중 둘은 대학에 보내고 다른 둘은 고등학교, 다른 하나는 중학교에 보내 모든 자식을 충분히 가르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고 어르신은 말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가족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배움을 기꺼이 포기했던 눈물겨운 희생이었다. 여든 하나에 다시 잡은 연필, 꾹꾹 눌러쓴 눈부신 청춘 다섯 남매를 반듯하게 키워내고 노후가 찾아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글을 모른다’는 답답함이 남아 있었다. “농사짓고 살 때는 몰랐는데 조합이나 은행 같은 데 가서 뭐 쓰라고 할 때 못 쓰니 마음이 참 안 좋더라고.”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넷째 딸의 권유로 어르신은 2년 전, 여든하나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평생학습관의 문을 두드렸다. 배움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제일 힘든 건 아침에 배워도 돌아서면 잊어먹는다는 거. 국어공부에서 어려운 건 한글은 입에서 발음은 똑같은데 쓸 때는 받침이 여러 종류라 어렵더라고. 산수에서 몇백만, 몇천만 할 때는 0자가 많아서 어렵고 영어에서는 A, B, C, D는 쉬운데 뒤로 갈수록 P, Q, R 이런 것은 헷갈려.” 하지만 어르신의 열정은 뜨거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학교엘 갔지. 일해야 하는 날에는 빠지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추워서 못 가고 미끄럽다고 안 오는 날도 있더니만 나는 그런 날에도 학교에 갔어. 밤에 책상에 앉아서 꼭 복습해봐야 생각이 나더라고.” 어르신은 침대에 앉아 사용할 수 있도록 넷째 딸이 사준 책상에 앉아 일기를 썼다. 띄어쓰기나 마침표는 빠져 있고, 받침이 헷갈려 여러 번 고쳐 쓴 흔적도 가득하다. “이게 말이 되나 안 되나 무조건 써보자고 쓴 거지. 글자 써보려고 공책 한 권 다 쓰고 또 다른 공책도 쓰고 그랬어”라며 쑥스러워했다.
조오남 어르신이 정성 들여 쓴 일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