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wing 07. Speed’, Ink on Paper, 49×65㎝
별명은 누가 불러줄 때보다 그걸 스스로 사용할 때 더 재밌는 듯하다. 농담을 ‘다큐’로 받는 탓에 나는 그럴싸한 별명이 없지만, 남편은 자칭 ‘시티보이’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꾸 그렇단다. 그러는 남편이 얼마 전 티브이에 청주 무심천이 나오자 어릴 적 동네 형이 데려가 놀던 곳이라며 반색했다. 겨울이면 두툼한 얼음이 깔리던, 형들이 얼음에 태워줬던 데라고.
얼음 위에서 놀았다고 하면 그렇구나, 했겠지만 ‘얼음에 태웠다’니 도통 이해가 안 됐는데, 겨우내 꽁꽁 언 물은 봄이 오면 가장자리부터 녹아 얼음판이 되어 떠내려간단다. 그걸 잡아타고 출렁이는 얼음 위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다 뭍으로 뛰어내리는 게 놀이였다나. 친형도 아닌 ‘동네 형아’가 다섯 살짜리를 둥둥 떠내려가는 얼음판에 싣는 걸 말리는 집안 어른은 물론 동네 어른조차 없었다는 말에 나는 입이 떡 벌어졌지만, 남편은 추억을 쏟아내느라 신바람이 났다.
그뿐인 줄 아느냐, 한겨울에 삼촌이 스케이트 날을 나무판 아래 덧대어 썰매를 만들어준 건 또 얼마나 재밌었는지 모른단다. 얼음 썰매 얘기가 반가우셨는지 옆에서 듣던 아빠도 말을 거들었다. 그럼, 그렇고 말고.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걸 보면서 썰매 타는 게 최고로 재밌지. 스케이트 날로 만든 건 엄청 고급인 거야. 나 어릴 적에는 송판에 철사 감고 코에는 못을 박고!
시티보이는 무슨…. 세월을 건너 시골서 자란 추억이 오가는 걸 보니 내가 2년째 눈독만 들이고 있는 ‘천천투어’ 생각이 났다. 뗏목을 타고 양재천을 따라 생태환경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인데, 아이들을 대상으로 시작해 시니어를 위한 벚꽃놀이를 거쳐 올해부터인가 일반인으로 확대 운영됐다. 너른 강 대신 좁은 천(川)을 ‘천천히’ 둘러본다는 말에 관심이 갔지만 아쉽게도 10월까지만 운영했으니, 올해도 놓치고 말았다. 그것 아니라도 서울에는 즐길 거리가 참 많아서 지하철 안에도 호선별 명소가 병기된 노선도가 있다. 볼 때마다 여기도 가봐야지, 저것도 재밌겠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 다 가나, 지레 포기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심한 길치인 덕분에 길 잃은 김에 우연히 그런 데를 보게 되는 일도 가끔 있다는 것! 며칠 전에는 휴대전화 내비게이션을 켜놓고도 길을 헤매다 운 좋게 낙원상가에 발길이 닿았다. 시간에 쫓기던 중이었지만 호기심에 계단을 따라 올라간 게 발단이었는데, 뜻밖에도 포스터를 보니 낙원상가 건물 안에서 미술 전시를 한다는 것 아닌가.
건물 사무공간, 무심하게 툭 있는 전시장 412호에 온다 아키의 ‘백남준의 영혼이 내게 말했다’가 있었다. 아티스트가 작고한 작가 백남준과 아날로그 라디오의 전자기파를 통해 공명하고 유대를 느꼈다는 내용의 작품이었다. 발상 참 신기하다고 한번 웃고 휘 보고 나가려는데 문득 나를 이해해 주는 이가 얼마나 간절하게 ‘고팠으면’ 그렇게라도 만났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에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서 있었다. 왜 그랬는지 예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만났던 가이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피렌체는 예뻐서 길을 잃어도 좋아요. 어디를 걸어도 좋을 테니 그것조차 즐기시길 바라요, 천천히.”
어디를 걷고 있는지 몰라도 천천히 흘러도 좋은 시간이 있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는지, 아니면 온다 아키의 외롭고도 따뜻한 이야기를 들어서였는지, 문을 나서며 전시를 보기 전 바삐 걷던 마음이 훨씬 차분해졌다.
어쩌면 나는 이미 뗏목에 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작은 하천을 구석구석 누비는 불안한 듯 안정적인, 뗏목 말이다. 가고 있는 곳이 강물인지 하천인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알 듯하다. 그곳의 물은 천천히 흐른다.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