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오후 서울 성동구 성수동 상원어린이놀이터에서 성수1가2동 마을계획단 어린이분과 최혜림(왼쪽부터)양, 윤혜경 전 마을사업전문가, 이민규·윤예준군, 강준희·최하영·김소은양이 창의놀이터를 둘러보고 있다.
지난 11일 오후 성동구 성수동 상원어린이놀이터에서는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낡은 놀이터를 창의력과 모험심을 키울 수 있는 놀이터로 바꾸는 서울시의 창의놀이터 조성 사업이었다.
“와, 음침했던 놀이터가 확 밝아졌네.” 공사가 잠시 중단되고, 어린이 6명이 놀이터에 들어섰다. 창의놀이터 선정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성수1가2동 마을계획단 어린이분과 회원들이다. 이민규(경동초 6학년)군은 “예전에는 놀이터에 나무가 우거져 어두컴컴한데다, 아저씨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의자에 누워 있어서 친구들이 무서워했다”고 말했다.
놀이터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아이들은 거미줄 모양의 놀이기구를 보자 신이 나 뛰어갔다. 윤예준(경동초 5학년)군은 다리 아래 동굴에 관심을 보였다. 어린이분과를 이끄는 윤혜경 전 마을사업전문가는 “동굴은 놀이터에 잠깐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아이들이 낸 아이디어”라고 말했다. 또 “일부 어른들은 나무 몇 그루만 남아 새 놀이터가 휑해졌다며 큰길에서 시야가 가려져 아늑했던 예전 놀이터가 낫다고 하는데, 아이들은 다른 사람이 보기 어려운 곳을 안전한 공간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무서운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기 어려울 것 같아 이 놀이터의 절반도 되지 않는 아파트 놀이터에서만 놀았다. 두세 배 넓은 놀이터가 있는데 사용하지 못해 아까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2년 전만 해도 이 놀이터를 자신들이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2015년 서울시는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사업의 하나로 성동·성북·도봉·금천 등 4개 자치구 14개 동에 마을계획단을 만들었다. 주민이 느낀 지역의 문제를 공유하고 토론하면서 마을 계획을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성수1가2동 마을사업전문가로 뽑힌 윤씨는 주민을 찾아다니며 마을계획단의 취지를 알리고 가입을 설득했다. 그때 가장 먼저 가입한 사람이 민규군의 어머니 김혜진(46)씨였다.
김씨는 “처음에는 관공서에서 하는 일이라 마을계획단에 부정적이었는데, ‘함께 마을에서 재미있게 놀아보자’는 윤 선생님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마을에서 가장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사람이 ‘놀이터 죽돌이’인 민규라고 생각해 함께 가입했다”고 말했다. 민규군은 “동네 놀이터와 서울숲을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데, 친구들은 학원 가느라 바빠 만나기 힘들었다. 마을계획단에 들어가면 아이들과 같이 놀 수 있을 것 같아 들어갔다”고 말했다.
지역아동센터를 6년 동안 운영한 경험이 있는 윤씨는 11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마을계획단에 들어오자 어린이분과를 따로 만들어 지난해 초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마을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마을을 돌며 동영상을 촬영해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만들기도 했다.
성수1가2동 마을계획단 윤혜경 전 마을사업전문가(맨 왼쪽)가 어린이분과 회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모임이 처음부터 원활했던 건 아니다. 서울숲에 간 날 첫눈이 오자 아이들은 원래 계획은 까맣게 잊고 눈싸움을 시작했지만, 윤씨는 아이들을 제지하는 대신 함께 노는 것을 선택했다. 김씨는 “아이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엄마들이 조바심낼 때, 윤 선생님은 절대 관여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온전히 맡기라고 했다. ‘저래도 되나’ 걱정도 됐지만, 아이들이 정말 즐거워하는 걸 보고 모임 날은 학원도 보내지 않게 됐다”고 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은 평소 불편하게 느꼈던 점도 말하기 시작했다. 우회전하는 차량이 다릿발(교각) 때문에 신호를 보기 힘든 건널목에서는 사고가 날 뻔했던 아찔한 경험담이 쏟아졌다. 윤씨는 이 문제점을 성동구에 마을 의제로 제안했고, 건널목 앞에 과속방지턱이 생겨 문제는 해결됐다. 상원어린이놀이터 문제는 지난해 6월 정원오 성동구청장이 참석한 마을총회에서 민규군이 직접 발표했지만, 문제는 예산이었다. 한달 뒤 개선 방안을 논의하는 실행워크숍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참석해, 창의놀이터에 지원해보라고 제안했다. 상원어린이놀이터는 서울시가 올해 50억원을 들여 창의놀이터로 바꿀 어린이놀이터 20곳에 뽑혀 이달 말 개장을 앞두고 있다.
윤씨는 지난 6월 말로 마을사업전문가 임기가 끝났지만, 성수1가2동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성동구와 계약은 끝났어도 마을과 계약은 끝나지 않았다'며 엄마들이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어린이분과가 잘될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어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어린이분과를 만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설프게 개입한 어른들이 성과를 요구해 애들이 힘들어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민규군은 “지금까지 여러 프로그램을 해봤지만 마을계획단 활동이 가장 좋았다. 친구들과 돌아다니며 마을에 대해 새로운 것도 많이 알게 됐다. 전에는 ‘마을’ 하면 뚝섬역과 아파트만 떠올랐는데, 지금은 예쁜 공방, 특이한 벽돌집, 성동구, 서울시 등 떠오르는 게 훨씬 많아졌다”고 말했다.
글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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