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린 기린 그림

‘숨’ Jaye 지영 윤

등록 : 2025-09-25 16:49
Dance No.1 Mixed Media on Paper, 53.5×76.5㎝

녹음이 푸르르다 못해 우거진 계절이 되니 서울에 나무가 이렇게 많았나 가끔 깜짝깜짝 놀란다. 샹젤리제 거리를 본떠 네모반듯 다듬어진 가로수가 있는가 하면 자연의 손길로만 매만져 새 둥지 하나쯤은 틀림없이 있겠다 상상이 되는 나무도 있다.

이런 나무 저런 나무, 매미 소리는 골고루 성가셔 귀 따갑다고 구시렁대다가도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늘을 즐긴다는데 ‘나 참 박절하구나’ 반성한다. 어찌나 더운 여름인지 31도 바람마저 선선하게 느껴지는 희한한 오후, 잘 익은 검보랏빛 포도송이를 씻다가 문득 마을정원사팀 회장이 사진으로 보여준 그린폴 골목정원의 포도는 어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린폴 골목정원은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철공소 단지에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들어서며 형성된 문래창작촌에 자리한 공원이다. 어떤 일은 안 그렇겠느냐마는, 영등포구가 정원도시를 선포하며 골목길 곳곳에 화단을 조성하자고 한 걸 누구나 반긴 건 아니었단다. 철공소 상가의 실생활 불편과 직결된 곳에 예산이 사용돼야 하지 않느냐 등의 의견도 있었다고. 누구나 ‘내가 그린 그림’이 더 좋아 보이는 법, 행정과 상인 간의 이견을 조율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까지 1년여가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공원을 조성하고 나니 그곳에 사는 사람, 보는 사람 모두 좋아했는데, 어떤 이는 얼기설기 엮은 차양 같은 구조물에 포도까지 키운단다! 정원 조성 단계부터 참여한 마을정원사팀은 올봄, 어렵게 마련된 특색 있는 정원이 나무도 시들고 사람 손을 타지 않아 망가진 걸 보며 속이 상했다. 뭔가 주도적으로 할 일을 만들자고 생각하던 차라 마을정원사팀이 관리해보겠다고 제안했는데, 물을 끌어와야 하니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서로가 낯설뿐더러 활동에 대한 견해차까지 있어서 조심스러웠지만 하루가 멀다고 물 주고 꽃과 나무를 관리하며 때때로 커피 한 잔도 권하니 ‘숨’이 트이듯 사르르 말문이 트였다고. 관리 3주 만에 나무에 생기가 돌고 꽃도 타고난 빛을 발하는 등 확연한 성과를 보이니 요즘은 여기 좀 손봐달라, 튀어나온 거 묶어달라, 저기 좀 잘라달라, ‘민원’이 속출한단다. 쓰레기와 토사물 등 화단이 입은 피해에 대한 상인들의 하소연도 가끔 봉사팀 귀에 들어오는데, 그럴 때는 알게 모르게 봉사팀이 행정과 상인 간의 가교가 된 듯해 자부심도 든단다.

“꾸준하게 열심히 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진 게 아닌가 해요. 특별한 대화보다는 반복되는 일상적 대화가 마음을 열어준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린폴 골목정원이 형성되고 유지되는 과정에 대해 들으니, 문득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본 모네의 연작 ‘수련’을 보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수련’이 여덟 개의 커다란 벽면에 펼쳐 있는데, 정원 산책하듯 보며 따라 걸을 수 있다. 천천히 그림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 순간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이고 물의 깊이마저 느껴져 도대체 이걸 어떻게 그린 걸까 한참을 뜯어봤다. 그때 알게 된 게, 신비하게마저 느껴지는 ‘수련’의 깊이는 덧칠이 아닌 시간을 두고 조금씩 다양한 색으로 다른 형태를 겹쳐 칠했기 때문에 생겼다는 것.

독특한 운치가 있는 골목정원도 어쩌면 철공소 상인, 예술가, 행정 주무관에 마을정원사까지, 각자의 시대에 각자의 숨결로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을 겹쳐 칠해온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여러 사람이 그린 그림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지는 건, 무엇보다도 내 것뿐 아니라 ‘네가 그린 기린 그림’도 잘 그렸다, 보려고 노력하고 소통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마음 덕분에 골목정원은 오늘도 알록달록 푸르게 ‘숨’을 쉰다.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