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광희동 ‘새로운 골목문화 만들기 주민협의회’의 연제덕 회장이 골목 환경이 개선된 ‘중앙아시아 거리’에 서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서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과 가까운 중구 광희동의 ‘먹자골목’. 폭 9m, 길이 163m의 일방통행로 양편으로 식당과 호프, 노래방 등 70여개의 크고 작은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근처에 러시아, 몽골,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외국인들이 많이 살고, 이들을 상대로 한 가게들도 여럿 있어 흔히 ‘중앙아시아 거리’나 ‘몽골 타운’이라고 한다.
지난 26일 저녁, 이곳에선 여느 유흥가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가게들이 환하게 불을 밝혔지만 거리 어디에서도 손님들을 부르는 ‘풍선간판’(에어라이트)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골목은 어수선하지 않았고, 사람과 차량의 통행도 수월해 보였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골목이 좋아졌어요. 무엇보다 상인들 사이의 거리감이 좁혀졌고.”
훤해진 먹자골목을 가리키며 연제덕(61) ‘새로운 골목문화 만들기 주민협의회’ 회장이 말했다. 그의 말에서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났다.
협의회는 지난해 11월 공식 출범한 이 골목 상인들의 자치조직으로, 70여개 가게의 업주들이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 다른 상가 지역에 흔한 ‘상인회’나 ‘상가번영회’와 달리 골목문화 개선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내거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중구청과 광희동주민센터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렇게 이름 붙였다. 협의회 구성 전엔 7월부터 10월까지 상인들이 모두 네 차례 모여 협의회의 방향과 역할 등을 놓고 의견을 나눴다.
협의회 구성 뒤 먹자골목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게 풍선간판 자진 철거다. 지난 3월까지 골목에는 높이 2~3m짜리 풍선간판 30여개가 낮부터 어지럽게 서 있었다. 풍선간판은 상인과 구청 사이는 물론이고, 상인들 간에도 갈등을 낳는 골칫거리였다. 연 회장은 “내 점포 앞을 풍선간판으로 가리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구청에 신고해 강제 철거를 당하고, 운이 나쁘면 100만원이 훨씬 넘는 벌금까지 물고. 그야말로 갈등의 악순환이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협의회는 먼저 노래방의 풍선간판을 타깃으로 삼았다. 노래방을 운영하는 연 회장이 적극적으로 동료 업주들을 설득했다. 연 회장은 “노래방은 대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손님들이 찾아오니 골목 1층의 식당들 앞에 노래방 풍선간판을 최소한 밤 10시 전에는 내놓지 말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노래방 업주들이 어렵게 뜻을 모았고, 3월 말부터 먹자골목에선 풍선간판이 자취를 감췄다.
풍선간판 자율 정비에서 자신감을 얻어 더 나은 골목을 만드는 여러 일도 벌이기 시작했다. 깨끗한 골목을 위해 업소들이 쓰레기를 밤 10시에서 10시30분까지만 내놓기로 결정하고 실천하고 있다. 구청에 요청해 골목 안 아스팔트를 깨끗하게 포장했다. 5월엔 화목한 동네 분위기 조성을 위해 어르신 80여명을 초청해 경로잔치도 열었다. 먹자골목을 찾은 회사원 김아무개(35)씨는 “가끔 동료들과 회식을 위해 들르는데 동네가 예전보다 말끔해지고 지나다니기 편해졌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이 좋은 평가를 받아 먹자골목 협의회는 지난 21일 중구가 개최한 ‘2017년도 상반기 새로운 골목문화 창조 우수사업 발표회’에서 최우수상(1등상)을 받았다. 김정희 중구청 골목문화창조팀장은 “주민들 스스로가 문제를 발굴하고 해결하기 때문에 구청과 동주민센터는 되도록 법적·행정적 지원 업무에 치중하고 있다”며 “골목문화 개선의 바람직한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구청 쪽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먹자골목을 찾는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오전 11시부터 낮 2시30분까지 인근 도로에 차량 주차를 허용해주기도 했다.
중구는 서울의 어느 지자체보다 골목문화 개선을 통한 마을 살리기에 열심이다. 2015년 하반기에 다산동에서 골목문화 시범 사업을 시작한 뒤 지난해 1월 구 전역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지금은 일반구역 62곳, 시범구역 40곳에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새로운 골목문화 창조사업은 단순한 환경 정비가 아닌 살맛 나는 공동체 문화를 주민 손으로 만들자는 자율형 시민운동”이라고 밝혔다.
협의회는 최우수상의 기세를 살려 골목 상권 살리기에 적극 나설 작정이다. 이를 위해 오는 10월21~22일 다문화축제를 거창하게 열 예정이다. 서울시로부터 이 축제를 위한 예산도 1억원 넘게 받아놓았다. 연 회장은 “다문화축제를 잘 치러내 광희동 먹자골목이 명실상부한 ‘중앙아시아 거리’가 되게 할 것”이라며 “주민들의 자발성이 이렇게 큰 변화를 만들어낼지는 솔직히 몰랐다”고 했다.
정재권 선임기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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