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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으로 뭉친 외로운 독거남들…이웃 도우미로 우뚝

나눔밥상공동체로 성장한 방학1동 모임, ‘오늘은 내가 요리사’

등록 : 2017-06-08 16:41
방학1동 ‘오늘은 내가 요리사’ 회원들이 요리를 마친 뒤 식사를 함께하고 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윤재 복지위원. 방학1동주민센터 제공
도봉구 방학1동 주민 이윤재(43)씨는 2015년 3월 방학1동 복지위원(현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으로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주민센터 직원들과 함께 마을에 사는 취약계층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도움을 원하는 주민의 신청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주민이나 가정을 찾아내 돕는, 서울시의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사업의 하나였다.

가정방문을 다녀보니 공통점을 가진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혼자 사는 남성들이었고, 먹는 게 부실해 영양 불균형이 심각했다. 쌀은 여러 곳에서 후원해주는데 반찬거리를 마련하기 어려워, 밥 한 그릇에 반찬 한두 가지로 한끼를 때우는 게 일상이라고 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딱히 없는 하루하루를 혼자 보내다 보니 밥을 거를 때도 잦았다.

주민센터는 반찬을 집으로 배달해주는 대신, 이들을 모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지원하기로 했다. 함께 요리하면 균형 있는 식사를 할 수 있고, 모임이 계속되면 이웃끼리 담을 허물고 서로 돕는 공동체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40~80대 중·장년 남성 6명이 참여하면서 모임 이름은 ‘오늘은 내가 요리사'로 정해졌고, 이 위원이 진행을 맡기로 했다.

40~80대 중·장년 남성 6명 참여

만 2년이 지난 5월23일 오후 주민센터 지하 다용도실에서 이들은 여전히 요리 중이었다. 조리법과 재료들은 이 위원이 인터넷에서 살펴보고 장을 봤지만, 요리는 함께 의논하며 다 같이 했다. 칼질은 학교 조리사 출신의 김종찬(49)씨가 전담했다. 뇌출혈로 쓰러져 장애등급을 받은 뒤 재취업에 번번이 실패하는 바람에 사기가 떨어졌던 김씨는 여기서 신나게 칼질을 하며 웃음을 되찾았다.

밥은 최행복(66)씨 담당이다. 전남 해남 출신인 최씨는 집에서 고등학교를 보내주지 않자 홧김에 서울로 가출해 구두닦이, 미아리 ‘요꼬’(니트)공장 등을 전전했다. 15년 동안 쪽방촌에서 지내며 알코올의존증이 심해졌지만, 주거 긴급지원으로 임대주택에 살게 되면서 안정을 찾았다. 이 위원은 “아저씨가 모임에 나온 뒤로 술을 계속 줄여 지난해에는 거의 끊었는데, 올 초 모임이 쉬는 석달 동안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반찬 종류부터 간까지 상의해 결정

나머지도 각자 재료를 맡아 손질했다. “짜요?” “싱거워요?” “간장을 더 넣을까요?” 이 위원은 “입맛이 다 다르니까 상의해서 간을 맞추다 보니 그때그때 음식 맛의 편차가 크다”며 웃었다. 2시간 동안의 요리가 끝나자 다음 주 모임에서 만들 음식을 정했다. 누가 고등어김치찜이 먹고 싶다고 하자 2주일 전에 고등어 요리를 한번 했으니 이번에는 등갈비를 넣고 김치찜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

반찬은 6인분이 아니라 8인분으로 나눴다. 나머지 2인분은 더 어려운 이웃에게 배달할 반찬이다. 도와줄 이웃도 6명이 직접 추천해 결정한다. 최씨는 “동대문 쪽방촌에 살 때 알게 된 친구가 앞집으로 이사 왔는데, 손을 다쳐 수술을 세번이나 했는데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며 매주 일주일 치 반찬을 갖다주고 있었다.

어르신 마을잔치 돕고 단열 공사도

‘오늘은 내가 요리사' 모임은 지난해 6월부터 마을 어르신 생신 잔치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호박전을 소쿠리 가득 부치며 일손을 보탰던 박성중(48)씨가 그날 저녁 ‘매주 요리시간을 통해 가족애를 느낀다’는 메시지를 보내 이 위원을 감동하게 했다. 가구공장에서 인테리어 일을 하다 손가락 절단 사고로 장애등급을 받은 박씨는 마을에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는 사람이 되었다. 자전거에 연장을 잔뜩 싣고 다니며 홀로 사는 어르신들의 집을 수리해주고 보일러까지 고쳐준다. 지난겨울에는 동료들도 그와 함께 출입문과 창문에 문풍지와 뽁뽁이(단열 에어캡)로 단열 공사를 하며 이웃을 도왔다.

지난해 10월에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당뇨합병증으로 왼쪽 눈을 실명한 김종선(58)씨가 연락도 없이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다들 걱정이 돼 반찬도 갖다줄 겸 집에 찾아가보니 김씨가 쓰러져 있었다. 이틀에 한번 받는 신장 투석의 부작용이었다. 바로 119에 신고해 응급실로 옮긴 덕에 금세 퇴원했지만, 그대로 방치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상황이었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높은 경쟁률을 뚫고 노원구 공릉동의 영구임대주택에 당첨돼 동료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요리 모임에 못 나오게 된 김씨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몰라 많이 적적하다”며 지금도 방학1동 도깨비시장으로 장을 보러온다.

최근 서울시는 지역의 주민이 주체적 활동가로 성장해 마을과 이웃을 돌보는 ‘나눔이웃' 사업의 우수 사례로 ‘오늘은 내가 요리사’ 모임을 소개했다. 알코올의존증, 장애, 실명 등으로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던 남자들이 이제 서로를 돌보고, 이웃을 돌보는 나눔밥상공동체가 된 것이다.

원낙연 기자 yanni@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