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석의 좋은 건축 나쁜 건축 이상한 건축

멀리서 보면 랜드마크, 다가서면 불친절한 거인

➊ 555m 롯데월드타워

등록 : 2017-06-01 16:06 수정 : 2017-06-01 16:12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롯데월드타워. 서울의 야경 속에서 123층, 555m의 랜드마크가 위용을 자랑하는 듯하다. 타워 뒤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멀리 남산의 N서울타워도 불을 밝히고 있다.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인간의 노력으로 만든 것들이 보잘것없던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마음에 흔적을 남긴 큰 산이나 강 같은 자연의 특별한 지형지물이 길 떠나는 사람들의 향도가 되어줬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랜드마크라 한다.

도시는 복잡해지고 사람이 만든 것들이 근처에 보이는 자연물보다 크고 눈에 띄기 쉬워지면서 높은 탑이나 조형물, 건축물 같은 인공물도 랜드마크 구실을 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요즘 새로 짓는 건물들은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랜드마크임을 주장하며 생김새나 덩치를 뽐내려 해, 도시가 어지럽고 멀쩡한 대낮에도 길을 잃을 지경이다. 그러던 중 상황을 일거에 도토리 키 재기로 만든 강자가 나타났다. 십수년을 회자되며 우려도 낳고 사고도 잦았던 롯데월드타워(이하 롯데타워)가, 정말로, 잠실벌에, 우리 눈앞에 우뚝 선 것(지난 4월3일 개장)이다.

건설계 인사들은 세계적인 건설 강국인 대한민국에 100층 건물 하나 없다며 한탄했고, 경제 전문가들은 수조원대의 지역경제 유발 효과를 언급했다. 이에 질세라 정치인들은 선진국의 자긍심을 내세우며 100층 이상 마천루 경쟁에 불을 지폈다. 심지어 어떤 지자체마저 경쟁자 리스트에 해당 청사를 올리려다 호화청사에 전시행정이라는 비난으로 쓴맛을 보기도 했다.

이제 서울의 웬만한 위치에서는 그 위용을 실감할 수밖에 없는 555미터 높이에 123층의 롯데타워가 세워졌으니, 세계의 내로라하는 고층 건물 등위에 우리나라 건물도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롯데타워가 시작은 했으나 여러 다른 기업들도 서울, 부산, 인천 등지에 100층 이상의, 혹은 롯데타워보다 높은 건물들을 야심 차게 계획 중이니, 한국에서 벌어지는 마천루의 높이 경쟁은 말잔치가 아닌 실제 상황이 되었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배즈 루어먼 감독, 2013)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빛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유성을 보며, 자신의 삶이 그 빛처럼 끝없이 올라갈 것을 갈망한다. 그는 자신의 운명과 욕망을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가 옛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 지었던 화려한 저택이 그랬듯, 건축은 그 목적이 무엇이든 만드는 사람의 욕망에서 시작된다. 건축은 환경의 부정적인 영향으로부터 인간 자신을 보호하려는 노력으로 생겨났지만, 이내 그것은 개성이나 사회적 영향력 등을 표현하려는 욕망 분출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가 되었다.

매일같이 보는 건축주나 건축가의 욕망이 새로울 것은 전혀 없지만, 롯데타워의 존재에 대한 당위성이 부르즈할리파나 타이베이 101과 비교해 마냥 뜬금없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손바닥만 한 자취방이나 집 앞의 나무 한그루도 나를 만들진대, 엄청난 규모의 건물이 오랫동안 시민의 삶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그 존재가 단순히 부분적 당위성만으로 안심될 리는 만무하다.

가격이 하락하면 수요가 증가한다는 기본적 경제 원리가 무색하게, 재화가 비쌀수록 거꾸로 수요가 늘어나게 만드는 인간의 과시욕을 설명한 베블런 효과는, 소위 명품을 향한 소비자의 욕망에서 쉽게 발견된다. 슈퍼리치 고객만을 위한다는 평당 1억원에 가까운 최상층 업무 공간과 7성급 호텔을 비롯해 ‘에비뉴엘’ 등 욕망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으로 가득한 마천루는 베블런 효과로 비롯된 기본적 일상의 소외에 대한 우려를 낳고도 남음이 있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롯데월드타워. 롯데물산 제공
건물의 외관은, 도자기와 붓의 유려한 곡선을 표현했다는 미국 설계회사 케이피에프(KPF)의 주장처럼, 대중을 향한 붙임성보다는 명품의 세련됨을 선택했다. 상업시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고, 의미 있는 한 획을 그으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한강 너머 꽤 멀리까지 둘러보아도 영향을 주거나 앞을 가릴 건물이 없어 도드라진다. 상부로 갈수록 작아지는 단면과 허공에 그어진 곡선의 긴장감이 경쾌하다. 도시의 스카이라인 위로 솟아오른 원경의 타워 모습은 서울의 랜드마크로 부끄러울 것 없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고, 길 가는 누구에게든 잠실을 물으면 손을 들어 가리킬 수 있게 해준 흥미로운 랜드마크의 문제는 정작 가까이 다가서면서 발생한다. 이 거대한 탑의 주변 도로에서 까마득한 위를 올려다보아야 하는 규모의 부조화는 시간이 흐르면 새로울 것 없는 바탕화면으로 느끼게 되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일상으로부터 등 돌린 자기 완결적인 하얀 벽은 주변 환경과 시민들에게 불친절하다. 물질적 유토피아를 감싼 벽은 이웃들이 그 밖에서 아무런 문화적 흔적도, 사회적 접촉도 찾기 힘든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보도를 걷게 만든다. 마치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단 한 조각의 달콤함도 나눌 수 없다 말하는 것처럼. 고급 상업시설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눈감아 넘기기에는 주변의 교통량과 밀도 높은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시의 상황이 부담스럽다.

결코 낮지 않은 고층 아파트를 바닥에 깔린 듯 보이게 만드는 그 거대함에 심리적 위축감을 호소하기 전에, 거인 스스로 무릎을 낮춰 시민들에게 손을 내밀 필요도 있었다. 타워가 올라가며 비워진 지면이 물리적으로는 시민에게 돌려졌으나, 걷고 휴식을 취할 전면 입구의 광장과 후면의 공원은 메마른 상상력의 볼품없는 결과로 이어졌다. 경비원들의 눈초리가 따가운 타워 후면의 진입로로는 접근조차 마음이 편치 않다. 집 안으로의 초대는 바라지도 않지만 집 밖 평상에서 물 한 모금은 나누게 하는 것이 대인이 베풀어 마땅한 여유 아니던가? 화려한 에비뉴엘의 금빛 심장도 그 아쉬움을 달래기엔 공허할 뿐이다.

건물 라인의 매끈함과는 달리, 이 덩치 큰 이웃의 등장이 예고된 이후 이 정도의 마천루라면 당연히 제기될 만한 수많은 우려와 잡음이 줄곧 있었다. 건설에 들고 운영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 환경적 부담, 일조권 피해, 교통 체증, 거주자와 인근 이용자의 심리적 압박, 보행 환경의 악화, 새나 비행체의 충돌 위험, 싱크 홀을 포함한 각종 안전 문제….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대중교통 환승센터와 건물의 친환경적 구성 등 당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반가운 노력과 배려도 눈에 띈다.

롯데타워는 우리에게 다가온 최초의 진정한 초고층 건물이다. 제기되는 사회적·환경적 우려를 귀찮은 투정이라 밀어두지 말고, 시민들의 바람을 두고두고 세심히 헤아릴 지속적인 정성이 필요하다. 이어령 박사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더 이상 넘쳐나고 주장하는 랜드마크가 아닌, 기억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마인드 마크가 절실한 것이다.

글 안준석 건축가·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