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피난처가 필요한 이들을 위하여
서울, 이곳 l 중구 명동
등록 : 2024-12-12 14:28
어렸을 땐 12월이 되기 전부터 들뜨곤 했다. 선물이라 봐야 가게에 파는 장화 모양 종합선물세트 정도, 반짝이 줄 몇 개를 휘감은 허접한 트리를 장식해 놓고도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지금은 천장까지 닿는 멋진 크리스마스트리가 집에 있는데도 벌써 몇 해째 베란다 창고에서 햇빛 구경을 못하고 있다. 나이 때문인지 문화가 바뀐 건지 크리스마스 감성이 다 말라붙었다. 캐럴이 울려 퍼지는 번화가를 걷기만 해도 마냥 신나고 들떴던 그 시절이 가끔은 너무 그립다.
우리나라에서 크리스마스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을 꼽으라면 아마도 명동이 아닐까 싶다. 크리스마스 즈음엔 백화점들이 설치하는 거대한 미디어 파사드를 보기 위해 일부러 명동을 찾는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내가 오늘 소개하고 싶은 곳은 근사한 트리로 눈 호강 시켜주는 백화점 앞이 아니다. 명동 번화가 속 숨은 보석 같은 두 곳, 삼일로 창고극장과 명동성당이다.
지난해부터 시민극단에 들어가 연극을 공부하고 있는데, 함께 연극했던 선생님 한 분이 공연에 초대해주셔서 지난여름 삼일로 창고극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외관은 모던해 보이지만, 벽돌이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이곳이 범상치 않은 역사의 현장임을 직감했다. 내부로 들어가보니 요즘 새로 지은 건물에선 볼 수 없는 꼬불꼬불한 통로, 고르지 못한 벽면, 무대 뒤로 좁다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나오는 분장실까지. 이곳이 1975년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소극장이란 사실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는 못 보았고 그 예전 신문기사로만 접했던 고 추송웅 배우의 ‘빨간 피터의 고백’ 등 연극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배우들의 웃음과 눈물과 땀방울이 곳곳에서 느껴지고 만져져 왠지 모를 감상에 젖었다. 지금은 공연 예술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신청해 이용할 수 있는 창작 플랫폼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동안 몇 번의 부침을 겪어선지 이 공간이 좀 더 오래 버텨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불볕 같은 여름과 언제 왔다 갔는지도 모를 가을을 보내고 또다시 명동을 찾았다. 그땐 바빠서 들르지 못했지만 극장 옆 명동성당을 지나치며 겨울에 다시 한 번 찾아오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명동성당은 그 앞을 수도 없이 지나다니면서도 안에 들어가본 적은 없어 항상 궁금했던 곳이다. 유럽에 여행 가면 자연스레 성당 투어를 하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에선 가톨릭 신자들만의 장소라고 생각해 안에 들어가보질 못했다. 나에게는 열려 있지 않은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보니 내가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게다.
명동성당은 이곳이 서울에서도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명동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고요했다. 1784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천주교식 세례를 받은 이가 나왔고, 그 뒤 100년에 걸쳐 핍박과 박해가 이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순교자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 공간이 격변의 한국사를 관통하며 군부의 칼날로부터 젊은이들의 목숨과 민주주의를 지켜낸 도피처가 돼주었다는 건, 이걸 정말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죽음은 영원한 소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빠져 성당 뒷마당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지하성당’이라는 팻말이 호기심을 자아냈다. 문이 열려 있긴 하지만 들어가도 되는지 조심스러웠다. 좁은 문을 지나 어둑어둑한 지하성당에 들어갔는데, 나는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한 충만한 안식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낮은 천장은 두꺼운 이불의 무게감처럼 포근했고 여러 개 촛불만 교교히 빛나는, 마치 암굴과도 같은 이곳에서 나는 누군가 뭉클하게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을 경험했다. 기도하고 계신 수녀님 뒷자리에 앉아 나도 따라 기도를 드렸다. “내 마음속 선한 본성을 끌어내 조금은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영혼의 피난처 같은 기도의 방 문을 열어놓아줘 감사했다. 사람은 때로 착해지고 싶은 본능이 작동할 때가 있다. 그건 아마도 명동성당이 그만큼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일 거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명동성당 (앞)
명동성당 (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