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잊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어두운 놀이터를 가득 채운다.
놀이터에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아이들은 아직 집으로 들어갈 마음이 없다. 미끄럼틀에서, 그네에서 놀던 아이들은 무대를 바꿔 시소를 의자 삼아 이야기 나눈다. 놀이터 한쪽에서는 큰 아이들이 줄넘기를 하며 춤을 춘다. 좀 작은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놀이터를 누비고 다닌다. 어두워질수록 공원 불빛은 강해지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어두운 놀이터를 가득 채운다. 아이들은 밤이라도 샐 기세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 인형처럼 보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고함 소리를 들으니,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언제부터 아이들 곁에서 놀이가 사라졌을까, 왜 자투리 시간에 놀 수밖에 없을까?’
놀이의 효율성을 따지면서부터였을까? 투자 시간 대비 결과를 따지는 효율성을 놀이에 대입하면 노는 시간에 차라리 다른 거 하는 게 남는 거라는 쪽으로 결론 내리기 쉽다. 은연중에 놀면 망한다는 강박관념이 깔려서 그런가? 그래서인지 노는 아이들을 보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노느니 하나라도 더 공부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효율성은 곧잘 교육적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기도 한다. 이때 교육적이란 건 눈으로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성과라는 말처럼 들린다. 놀이를 놀이 그 자체로 보지 않고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순간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이쯤에서 “신은 왜 아이들에게 놀이를 본능으로 주었을까?”라는 물음이 생긴다. 아니 아이들만이 아니다. 인간에게 왜 놀이를 본능으로 주었을까? 굳이 이래서 좋다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효율성을 따지지 않아도 삶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굳이 다른 곳에서 답을 찾지 않아도 신나게 놀고 난 아이들을 보면 금세 안다.
“너무너무 재미있었어!”
그래서 기를 쓰고 노는가 보다. 그저 노는 게 좋아서 노는 것뿐인데, 어른들은 자꾸 놀이에 의미를 덧붙이려고 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기 때문일 게다.
부모라면 다들 아이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자랐으면 한다.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창의력을 키우는 교육기관에 보내고, 자유롭게 사고하라며 수많은 책을 읽힌다. 그런데 자유와 창의의 바탕은 무엇보다 놀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놀이의 힘을 불신하는 창의성 교육은 아이를 그만큼 힘들게 만드는 것 같다.
아이들 어깨 위에 놓인, 보이지 않는 짐 덩어리. 어른들이 만들어놓는 ‘경쟁’이라는 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으려면 노는 시간이 아깝기만 하다. 뭔가 끊임없이 배워서 경쟁력을 높여 생존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경쟁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놀이가 꼭 필요하다는 말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놀아야 할 때 충분히 놀지 못해 생긴 감정의 찌꺼기는 어디로 갈까. 그것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글 사진 박찬희 자유기고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
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