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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청와대 습격사건’, 서울 북부 개발 ‘속도전’ 이끌다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 ① 1·21사태와 평창동 개발
북 기습에 놀란 청와대, 서울 북부 지역 빠르게 변화시켜

등록 : 2023-01-05 14:27 수정 : 2023-01-05 14:34

도시는 늘 변화한다. 서울도 대한민국의 수도가 된 이후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변화는 인구가 늘고 줄면서 서서히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특정한 사건에 의해 빠르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서울을 변화시킨 10대 사건’을 살펴보면서 서울의 도시 변화를 짚어보고, 앞으로의 변화를 전망해본다. 월 1회 연재. 편집자

종로구 북쪽에 있는 ‘평창동’에 대해 일반 시민은 그저 ‘북악산 넘어 호화주택이 즐비한 부촌’ 정도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1968년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북한산 우이동과 같이 인적이 드문 울창한 숲과 계곡에 불과했다.

① 1·21사태 희생자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동상

특히 여름철 주말이면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서울시민의 휴식처였다. 그 일대에 큰 건물이라고는 세검정길 종점에 있는 당시로서 극히 드문 러브호텔 ‘만하장’이 유일했다. 만하장(萬河莊)은 ‘천년만년 변치 않고 물이 흐르는 호텔’ 정도의 뜻이다. 1964년 관광호텔로 인정받아 영업을 시작한 이곳은 당시 교통이 불편한 평창동에 손님을 모시기 위해 호텔 전용차까지 준비했다.

②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

1964년 3월21일 ‘삼각산록 새봄에의 초대’라는 이름으로 일간지에 낸 만하장 광고를 보면, “세검정 오른쪽 골짜기에 새로 선 이 만하장 호텔은 조용한 연회석, 아베크, 산책객의 휴양처, 가족이 함께 교외 산록의 새봄 경치를 쉴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광고에 전화번호도 없었던 탓에 “사이비 목사나 바람난 신랑이나 신부 등이 은밀히 만나는 장소로 널리 이용됐다”는 말이 많았다.

③ 평창동


이렇게 한적했던 평창동이 지금은 고급주택이 빽빽이 들어찬 서울의 한 부촌으로 바뀌었다. 만하장 자리에도 현재는 평창롯데캐슬로잔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서울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개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평창동의 경우 이런 변화는 1968년 이후 더욱 급격히 이루어졌다.

④ 총격전이 벌어진 장소

1968년 1월21일 현재의 청와대 본관으로부터 불과 150m 밖에서 벌어진 남북한군의 총격전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1·21사태’ 또는 ‘청와대 습격사건’이라 부른다. 북한의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부대 31명이 완전무장한 채로 대한민국 대통령이 머무는 청와대까지 와서, 그것도 대통령의 목숨을 노리고 총격전을 벌인 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이 사건으로 31명의 북한군 무장대원 가운데 김신조를 생포했고, 28명은 사살, 2명은 도주한 것으로 간주해 작전은 종료됐다. 물론 우리 쪽도 종로경찰서장 최규식과 육군연대장 이익수 대령 등 총 32명이 희생됐다.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됐지만 청와대에는 비상이 걸렸고 당장 대통령경호실장, 수방사사령관, 서울시장 등이 모여 사건 후속대책을 논의했다. 다수의 북한군이 완전무장한 상태로 청와대 코앞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휴전선 넘어 파평산~노고산~북한산~북악산 등 산악을 이용했기에 가능한 것이라 보고 당장 청와대 뒤편의 인왕산, 북악산은 물론 그 너머에 있는 평창동 일대까지 개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⑤ 칠궁 담장을 허물어 도로가 확장된 곳

당시 청와대 북쪽으로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 너무 많아 건축 활동에 상당한 제한이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전쟁을 겪으며 북쪽에 대한 기피현상도 컸기 때문에 청와대 뒷산인 인왕산과 북악산을 경계로 그 북쪽으로는 도시개발 측면에서 완전히 소외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1·21사태를 겪은 이후 청와대 뒤편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천지개벽되고 만다.

‘개발제한구역’이던 평창동, 공원용지 해제되며 대규모 택지로 조성

평창동 전경. 1968년 이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북한산 우이동과 같이 인적이 드문 울창한 숲이었으나, 1968년 ‘1·21사태’ 이후 대규모 택지가 조성돼 현재는 ‘호화주택이 즐비한 부촌’으로 인식되고 있다.

열흘 만에 ‘북악스카이웨이 건설’ 발표

남산 1·2호 터널 ‘전시 방공호’로 기획

‘확전 불사’ 남북 대립 속 서울 변화 촉각

사건 발생으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2월9일 서울시는 인왕산과 북악산 능선을 관통하는 북악스카이웨이 건설을 발표하고 그로부터 12일 뒤 기공식을 했으며 7개월 만인 9월 28일에 ‘9·28 서울수복’을 기념해 개통식을 거행했다.

또한 당장에 문화재 ‘칠궁’의 담장을 허물고 청와대에서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현재의 창의문로를 확장했다. 지금은 무궁화공원으로 바뀐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현장인 ‘궁정동안가’와 마주보는 칠궁은 자신이 낳은 아들이 조선의 국왕이 됐지만 자신은 후궁 신분 때문에 남편과 아들이 있는 종묘로 가지 못한 7명 후궁의 신위가 모셔진 사당이다. 그 이전에는 문화재를 훼손할 수 없다는 논리가 강했지만 1·21사태 이후 이런 논리는 대통령의 목숨 앞에 더는 아무런 힘을 가질 수 없었다. 그야말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정책 집행이었다.

이런 여러 정책 가운데서도 핵심은 평창동 개발이었다. 평창동을 개발하기 위해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던 그 일대 43만 평을 공원용지에서 해제하고 주택을 지을 수 있도록 용도변경을 했으며, 그곳의 택지 조성 사업권을 ‘한신부동산’에 맡겼다. 물론 건설부는 다시 27만 평만 택지로 지정하고 나머지는 공원용지로 환원했지만 27만 평에 대한 택지개발사업을 책임진 한신부동산은 그 덕분에 엄청난 사업이익이 발생했다.

정부는 당시 시가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평당 1046원으로 불하해줬고 한신부동산은 그 땅을 택지로 조성한 뒤 최저 7천원에서 최고 2만3천원 가격으로 일반인에게 분양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1·21사태로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기로 한 국무회의 의결을 마치고 나와 그날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기자회견에서 김 시장은 제2순환선을 즉시 기공해 1969년 말까지 완공하겠다고 밝혔다. 당시까지 창덕궁 돈화문에서 동대문 구간을 개설하지 못해 제1순환선조차 준공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제2순환선을 완공하겠다고 밝힌 것은 결국 평창동과 정릉을 잇는 북악터널을 뚫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하지만 제2순환선은 계획보다 2년 뒤 1971년, 김현옥이 아닌 양택식 서울시장 때 북악터널이 개통됐다. 서울시 재정이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된 도시개발은 서울시 도시개발 역사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1·21사태로 인한 서울의 변화는 청와대 북쪽 지역의 개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청와대 남쪽으로는 1970년 남산 1호터널과 2호터널이 개통됐는데 이것은 그 뒤 건설된 3호터널과 달리 서울시 교통정책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시 대비용이었다. 두 터널이 교차하도록 건설해 그 교차하는 곳에 거대한 교통광장을 만들어 전시에 30만~40만 명이 대피소로 사용하도록 기획했다. 하지만 이런 기획은 건설과정에서 변경돼 교통광장은 없는 현재의 모습으로 준공됐다.

물론 이런 서울시의 모든 변화가 꼭 1·21사태 하나만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분단이 가져온 전쟁위기라 봄이 정확하다. 1·21사태가 벌어진 1968년은 특히 전쟁위기가 심각한 해였다. 1·21사태 이틀 뒤에는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이 벌어졌다. 미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동해 공해 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된 사건이다. 그해 10월에는 ‘울진삼척사건’도 벌어졌다.

이런 전쟁위기는 남북 양 진영의 군사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서울이라는 도시환경까지 바꿔버렸다. 남산터널과 북악터널, 평창동 주택단지와 북악스카이웨이 등은 이제 우리의 도시생활 속에 스며들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이 분단이 만들어낸 우리의 일상이기도 하다. 2023년 들어서면서 남북이 서로 적대의식을 높이며 확전 불사를 외치는 지금, 군을 넘어 시민 일상에는 또 어떤 변화가 불어닥칠지 우려의 마음이 짙어진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그림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