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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 일제 대규모 방공호…철거 대신 보존해야”

서울 등 전국 17곳 일제 흔적을 기록한 책 출판, 정명섭 작가

등록 : 2016-08-2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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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 곳곳에 남아 있는 일제의 흔적을 답사하고, 이를 책으로 담아낸 정명섭 씨가 23일 오전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 뒤편에 있는 경희궁 터의 일제 방공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겉으로 보면 무슨 시설인지 전혀 알 수 없죠. 흔한 표지판 하나 없으니.”

지난 2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서울역사박물관 뒤편 주차장. 정명섭(43) 작가가 주차장 끝과 이어져 있는 언덕 숲의 콘크리트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벽이겠거니 했는데, 벽 가운데에 큰 철대문이 하나 있다. 안으로 들어가게 돼 있나?

평소에는 닫혀 있다는 철대문은 이날 ‘운 좋게도' 열려 있었다. 인부들이 철대문 안쪽에서 호스로 물을 끌어와 언덕 숲 나무들에 물을 주느라 분주했다.

“1944년 일제가 만든 방공호입니다. 그런데 잠시 몸을 피신하는 보통의 방공호 수준이 아니에요.”

정 작가와 함께 대문 안쪽으로 10m쯤 걸어가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하지만 너무 컴컴해 더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부터 북서쪽으로 100m쯤 긴 복도가 이어진다고 한다. 이 복도의 오른쪽 벽면에 교도소처럼 여러 칸의 방이 자리 잡고 있다. 2층 형태의 다락방도 있다. 복도 끝은 원래 반대편 출입문이 있었으나, 1988년 시작된 경희궁 복원으로 숭정전이 들어서며 막혔다고 한다. 방공호에는 세면대나 화장실은 물론이고 물탱크, 발전설비 같은 시설도 갖춰져 있다. 일제가 비상시 중요 기관이 장기간 업무를 볼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다.

“서울 중심부인 경복궁과 광화문광장에서 불과 600m 떨어진 곳에 일본이 만든 대규모 군사 관련 건축물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겁니다.”


애초 이곳에는 17세기 초 광해군이 지은 경희궁이 있었다. 하지만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대부분의 전각이 헐리며 황폐해졌다. 그 뒤 빈터는 경작지나 연병장 등으로 쓰였다. 일제도 숭정전을 포함한 주요 시설을 훼손하고, 이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웠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이 방공호를 만들 때 경성중학교 학생들도 동원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경희궁 터 방공호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논쟁의 대상이라고 한다. 경희궁을 완벽하게 복원하려 들면 철거해야 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잔재라 불편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는 철거 대신 유지와 개방 쪽을 주장했다. “과거 전쟁이나 학살, 식민 지배 등과 관련된 흔적들을 돌아보는 ‘다크 투어리즘'이 세계적 추세예요. 서울 한복판의 이곳이야말로 다크 투어리즘의 결정판이 될 수 있어요.”

정 작가는 경희궁 터와 이 방공호에 새겨져 있는 슬픈 역사를 <일제의 흔적을 걷다>(더난 출판)라는 제목의 책에 담았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신효승·조현경·김민재 씨 등과 함께 2013년부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일제의 흔적 17곳을 살핀 기록이다. 그 흔적의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에는 전(쟁)사에 관심이 많은 박성준 육군 소령의 도움이 컸다.

서울에서는 경희궁 터 방공호 외에 용산 미군기지 안 일본군 시설, 남산의 통감부 및 신사 관련 시설, 대학로의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 건물 등이 소개돼 있다. 지방의 흔적으로는 러일전쟁에 대비해 만든 부산 가덕도의 외양포 해안포대 진지, 일본의 경제 수탈을 증언하는 전북 군산의 2층짜리 ‘시마타니 금고’ 건물, 태평양전쟁 때 자살특공대의 하나였던 신요 부대(합판으로 만든 보트에 폭발물을 싣고 목표물에 돌진하는 부대)가 주둔했던 제주도 성산 일출봉 해안 진지 등이 눈길을 끈다.

“용산에서는 일본이 만든 건물과 길을 미국이 고스란히 이어받아 사용 중입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하기 전에 용산을 살펴보는 것 자체가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지요.”

그는 전업작가다. 우리 역사의 이면에 가려진 사실들을 포착해 교양서와 소설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조선직업실록> <조선의 엔터테이너> <스승을 죽인 제자들> <김옥균을 죽여라> 등 30여 권의 책을 냈다. 웬만해선 어려운 ‘다산성’이다. 하지만 일찍부터 작가를 꿈꾼 건 아니었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에 대기업을 3~4년 다녔어요. 그 뒤 파주출판단지에서 9년 정도 바리스타로 일했어요. 그때 작가들을 만나며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생겼고, 결국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네요.”

역사를 글쓰기의 주제로 삼은 뒤로는 답사가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의 일부가 됐다. 역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던 탓에 발품을 파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말한다. 지금도 한 달에 서너 차례는 지방을 다녀온다. 서울에 있을 때는 밤 9시께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하루에 5~6시간씩 글을 쓴다.

왜 하필이면 ‘역사’일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의 의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아요. 잊어버리면 또다시 반복되니까.”

정재권 선임기자 jjk@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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