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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보면서’ 치는 드럼, 농인에 대한 편견 깨뜨리다

등록 : 2021-04-1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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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아인 밴드부 ‘농밴져스’ 2021년 오리엔테이션 현장

20~60대 기타·바이올린 등 악기 통해 ‘한 호흡’ 이뤄

“농인들이 더 당당하게 음악에 대한 애정을 세상에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농아인 밴드부 ‘농밴져스’가 2021년 활동을 위해 신입 회원을 모집한 뒤 지난 8일 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에서 첫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가졌다. 농밴져스 회원들이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담당해야 하는’ 악기를 들고 첫 합주 시범을 선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건반에 정유진씨, 바이올린에 이루리씨, 드럼에 박훈빈씨, 통기타에 성경학씨.

잔존청력 의지해 찾은 음감으로 ‘음악 애정’ 세상에 외쳐

“해서 안 되는 건 없다” 선생님 말씀에

‘반짝반짝 손짓 박수’로 화답하며 시작

긴장감 날리고 어느새 상기된 얼굴 돼

“드럼 소리를 ‘봐요’. 바닥에선 진동이 느껴지죠. 앰프에서도 진동이 느껴지고요. 그 진동을 몸으로 느끼면서 박자를 맞추는 거예요.” 드럼 채를 잡은 박훈빈(23)씨가 첫 연습을 마치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두 눈이 빛났다.


오른쪽 귀는 잘 들리지 않지만 왼쪽 귀에 살아 있는 ‘잔존청력’으로, 박씨의 두 귀는 드럼을 치기 위해 킥 페달을 밟은 두 발을 ‘고막’처럼 다뤘다. 여기 몸의 감각을 더해 미세한 진동을 붙잡았다. 소리를 ‘보고’ ‘읽고’ ‘느끼는’ 과정이다.

지난 8일 목요일 오후 7시 서울 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 지하 1층 합주 연습실에서 농아인 밴드부 ‘농밴져스’의 2021년 오리엔테이션이 열렸다. 어스름 저녁을 뚫고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예닐곱 명 예비 단원의 얼굴엔 긴장과 어색함, 또한 기대감이 역력했다.

농밴져스는 ‘농아인 밴드+어벤져스’의 합성어다. 시립서대문농아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밴드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데 음악을 할 수 있을까?’ 같은 편견을 가진 비장애인에게 농아인 밴드 존재를 알리자는 목표로 2015년 창단했다. 무엇보다 음악을 사랑하고 배우고 즐기며 사는 ‘농인 커뮤니티’부터 만들어보자는 의견을 우선했다. 전원 청각장애인 멤버로 구성한 만큼 보청기와 잔존청력에 의지해 음악을 배운다. 음악 교사의 손가락 수신호와 서로 간 호흡이 비결이다.

농밴져스는 2015년 서대문문화회관 꿈다락 찬조공연을 시작으로 해마다 단원들 실력을 쌓아갔다. 창단 4년차인 2019년엔 외부 공연을 6번이나 할 정도로 ‘호황’을 맞은 적도 있다. 하지만 곧 코로나19가 터져 무대에 설 길이 막혀버렸다. 이 때문에 이날 자리는 코로나19 이후 새 단원 정비와 비전 재확인, 나아가 ‘초심’을 다잡는 면에서 중요했다.

“해서 안 되는 건 없습니다. 천천히 하면 다 됩니다. 안 해서 안 되는 겁니다.” 김상욱(47) 음악 교사가 투명마스크 너머로 첫인사말을 건넸다. 박수 소리를 나타내는 반짝반짝하는 손짓, 인사를 나타내는 두 주먹을 흔드는 수어가 고요한 연습실을 가로질렀다. 활기가 살아났다. 농밴져스 단원들의 열의와 포부를 현장 통역과 여러 번의 ‘문자’ 인터뷰로 만나봤다.

건반을 맡은 정유진씨가 기자에게 건넨 대화

“걷지도 않았는데 넘어질까 겁내지 맙시다”

영등포구에서 온 정유진(43)씨는 건반을 맡았다. 신입이다. 2015년 농밴져스 첫 오디션에 지원했다가 당시 높은 경쟁률에 밀려 탈락했지만, 올해 재도전해 밴드에 합류했다. 정씨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우여곡절 음악 인생’을 요약해 설명했다.

“저는 6살 때부터 소리를 잘 못 들었는데, 잔존청력이 그래도 조금 있었어요. 가까운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지요. 희미하지만 그 소리가 참 좋더라고요. 성인이 된 뒤 직장을 다니며 한동안 악기와 멀어졌다가 이 소중한 기회에 다시 찾아온거죠.”

용산구에서 온 성경학(60)씨는 확신에 찬 손짓으로 “편견을 깨고 싶다”고 했다. 성씨가 설명했다. “오디션 지원 때 나이 때문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귀도 잘 들리지 않고요. 하지만 저는 노래를 좋아하고 기타와 드럼도 배우고 싶어요. 젊을 때 통기타를 좀 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젊은 친구들과 섞여서 즐겨보고 싶은데 제가 가능할는지 의문입니다.” 성씨는 ‘작사’에도 뜻이 있다며 휴대전화를 열어 직접 지은 시를 기자에게 내보였다.

김상욱 음악 교사와 최영훈 수어 통역사가 신입 단원 성경학씨와 이루리씨에게 기타 음계와 합주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물론 첫 시간부터 순조로울 리 없었다. 적절한 ‘악기 배분’이 첫 장벽이었다. 드럼 하는 박씨가 살짝 귀띔했다. “작년엔 제가 가장 어려서 (어른들에게 밀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렉 기타를 맡아야 했어요. 결국 연주해냈지만.(웃음)”

김 교사가 덧붙여 강조했다. “합주라는 건자기가 100의 연주 실력을 갖췄어도 팀을 위해 50 정도로 맞춰가는 느낌으로 하는 겁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해가면 100보다 더 빛나죠.”

시각과 청각 장애를 동시에 가진 익명의 ‘농맹인’ 희망자는 오리엔테이션 분위기를 보고 참여 여부를 결정하려고 했다가, 김 교사와 최영훈 수어 통역사의 동시 설득에 고민이 더없이 깊어지기도 했다. 김 교사는 단호했다. “앞으로 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넘어질까봐 겁내면 안 됩니다. 천천히 가면 됩니다. 단 꾸준해야 해요. 느리게 갑시다. 연습에 빠지지 마세요. 매주 목요일엔 직장과 애인보다 팀이 먼저인 겁니다. 책임감! 오늘부터 우린 ‘한 팀’이니까요.”

농아인 음악 훈련은 보통 몸의 ‘감각 키우기’에서 시작한다. 음악을 시작하거나 연주실력을 심화 중인 농아인들이 겪는 대표적인 어려움은 어쩔 수 없이 ‘정확한 음정’ 맞추기다. 기타나 베이스는 ‘플랫’이 있어 음이 구분되지만, 바이올린이나 첼로는 음의 구분이 없어 음정 맞추는 일이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현과 현 사이 거리를 가늠하고 감각으로 키워내는 데는, 정말 ‘훈련’밖에 답이 없다.

이에 대해 바이올린을 하는 이루리(37)씨가 본인의 ‘힘겨웠던’ 훈련 과정을 털어놨다. 이씨는 농밴져스 창단 멤버다. 잔존청력을 벗 삼아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을 했다. “화려한 소리와 연주자들의 퍼포먼스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음정지옥’에 많이 빠져요. 그저 평생 숙제다 여기는 거죠. 음감이 없을 땐 지판 위치에 대한 감으로 시작해 미세하게 틀렸는데, 지금은 잔존청력으로 음감을 기르려고 많이 노력합니다. 이 부분에선 비장애인이 하는 훈련법과 같아요. 결국 음감을 스스로 계속 만들어가는 게 답인 것 같더라고요.”


“베이스, 일렉 기타 연주할 새 단원 구합니다”

농밴져스 매니저로서 팀원들의 고락을 지켜봐온 문유미 사회복지사가 가장 최근 정기공연인 지난해 11월21일 ‘제3회 정기공연’ 무대를 회고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관객 20명만 모시고 유튜브로 비대면 공연을 했어요. 멤버들이 직접 정한 ‘네버엔딩 스토리’ 외 3곡을 연주했는데, 당시 농밴져스 멤버들 얘기를 담은 자작곡 ‘농밴져스’를 발표하는 등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에도 멤버들이 음악을 하는 이유를 전하고 이에 대한 관람객 반응을 볼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자리였지요.”

올해 멤버 구성에 한창인 농밴져스는 현재 베이스 기타와 일렉 기타를 연주할 새 단원을 모집하고 있다. 지난 11일 농밴져스 5년차 선배 단원인 이루리씨와 문자 대화 중 ‘입단을 고민하는 농인에게 전할 한마디’를 요청했다. 이씨가 조심스레 한 문장을 보내왔다.

“청인들의 편견 전에, 되레 농인 세계에서 음악에 대한 편견이 존재해요. 이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어요. ‘음악은 청인들 영역인데 농인이 무슨 상관인가?’ 하며 애초에 선을 긋는 거지요. 음악을 즐기는 농인들이 숨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이씨가 거듭 숙고한 뒤 다시 문자를 보냈다. “서로 다양성을 존중하며, 음악을 사랑하는 농인들이 더 당당하게, 그 음악에 대한 애정을 세상에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음악을 즐기는 것 그 또한 인간의 본능이자 감수성이니까요.”

농밴져스 제3회 정기공연 뮤직비디오 영상

https://youtu.be/6hREUGMLqUs

글·사진 전유안 기자 fingerwhal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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