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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 수단 미싱으로 예술작품 만들어”

‘메이드 인 독산-옷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전시회 연 독산동 미싱사 14명

등록 : 2020-11-19 14:38 수정 : 2020-12-0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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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문화재단의 전시회 제안에 동참

‘4대보험 적용’ 등을 옷 라벨에 새겨서

옷 만드는 사람들의 열악한 삶 표현해

“전시회로 자존감 높여 당당해졌으면”

독산동 미싱사 강명자(왼쪽)씨와 정의금씨가 11일 금천구 독산동 금나래아트홀 갤러리에서 자신들이 만든 작품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머리띠 두르고 데모는 못하지만, 작품을 통해서 우리 목소리를 한번 내보자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금천구 독산동 금나래아트홀 갤러리에서 ‘메이드 인 독산-옷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전시회가 11일부터 14일까지 열렸다. 이번 전시는 2019년 6명의 미싱사가 참여한 ‘지그재그 내 인생-245년 숙련공 미싱사들의 삶’ 전시의 확장판이다.

올해는 지난해에도 참여한 강명자(57)씨를 주축으로 정의금(47)씨 등 독산동 미싱사 14명의 작품이 전시됐다. 강씨는 11일 “미싱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미싱으로 일상에서 느낀 것을 표현했다”고 했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반세기 동안 우리 삶은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강씨는 지난 7월 ‘전태일 50주기 토론회’에 참석한 뒤 전시회를 열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소리는 똑같이 나오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1인 피켓 시위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마침 금천문화재단에서 전시회 기획 제의가 왔습니다.”

강씨는 “전태일 열사가 50년 전에 ‘인간답게 살고 싶다’며 근로기준법을 안고 불로산화했지만, 그 시대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며 “우리가 만든 옷에 사회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한번 담아보자고 해서 전시회를 열게 됐다”고 했다.

금천구 독산동 ‘20m 도로’ 일대는 소규모 봉제공장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과거 구로공단에 있었던 봉제산업이 ‘20m 도로’로 옮겨오면서, 노동자들도 일감을 따라 독산동으로 옮겨왔다. 세월은 흘렀지만 봉제공장 풍경은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가 봉제산업에 종사하면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인 ‘객공’으로 불린다. 이들은 정해진 일정액의 임금을 받는 게아니라, 작업 물량에 따라서 일정액의 삯, 임가공비를 받는다.

“퇴직금, 상여금도 없고, 4대보험도 적용이 안 돼요. 설, 추석, 하계휴가 모두 무급입니다. 점심시간도 1시간이 아니고 40분이죠.”

강씨는 “이곳은 하청에 하청에 재하청이라서 경력이 아무리 많아도 최저 시급에도 못 미치는 미싱사가 많다”며 “원청인 대기업에서 일정한 값을 받고 물품을 가공하는 임가공비를 줄여서 그렇다”고 한숨지었다.

미싱사 14명은 지난 9월부터 3개월간 아이디어 회의를 거쳐 생계를 위해 생산한 옷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예술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그동안 생산해온 옷을 재현해, 자신들 삶의 목소리를 옷에 담았다. 금나래아트홀 갤러리에는 형형색색의 세로 펼침막에 작가인 미싱사들의 기획 의도가 쓰여 있다. 세로 펼침막 바로 앞에는 생계 수단으로만 사용하던 봉제 기술로 만든 예술 작품인 옷이 걸려 있다.

강씨는 <봉제인의 밥은 실밥>과 <현장의 소리> 두 작품을 만들었다. <봉제인의 밥은 실밥>은 ‘실밥’을 먹고 사는 미싱사의 애환을 표현했다.

“군대에 가면 짬밥이라는 것이 문득 떠오르잖아요. 근데 금형공장을 갔더니 기름밥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럼 우리는 실밥을 옷에 너덜너덜 붙이고, 어떤 날은 퇴근 후 버스 안에서도 내 바지에 실밥이 붙어 있어요. 그래서 봉제는 밥이 뭘까 했을 때 실밥이더라고요. 우리가 노동하는 손 위에 실밥을 얹어서 표현해봤어요.”

<현장의 소리>는 미싱사들이 봉제공장 현장에서 느낀 노동과 관련된 문제, ‘비정규직 철폐’ ‘4대보험 적용’ 등을 옷 라벨에 새겼다. 50년 전과 비교해 변하지 않은 것들을 작품에 담았다.

<나의 노동의 값>을 출품한 정의금씨는 “옷은 라벨에 따라서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데, 나의 노동의 값은 얼마일까 생각하며 표현해봤다”고 했다. 그는 “외주 봉제공장을 하고 있는데, 단가가 너무 낮게 책정돼 시간당 수당이 너무 낮다”며 “인건비가 높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고 했다.

“옛날보다 요즘 봉제공장 환경이 더 열악해지면서 젊은이가 없어요. 우리 공장에서도 제가 막내인 것처럼 늙은 노동자들만ᅠ있어요.”

강씨는 1976년 열여섯 살에 미싱 일을 배워 44년째, 정씨는 1991년부터 29년째 미싱사로 일하고 있다. 강씨는 “공장에서 내가 제일 막내”라고 했고, 정씨는 “나보다 어린미싱사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더는 젊은이들이 오지 않는 봉제산업도 미싱사들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미싱이 부끄럽고 천한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서 가치를 알아가는 과정이면 좋겠어요.”

강씨는 이번 전시회와 작품 활동을 통해 주위 미싱사들이 자존감이 높아지고 당당하게 살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지금껏 생계 수단인 미싱으로 앞으로 지역 주민과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있다”며 “주로 미싱으로 ‘놀 수 있는 것’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했다.

이충신 기자 csl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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