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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 서면 한글이 보인다

등록 : 2020-10-08 15:20 수정 : 2021-01-2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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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맞이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 광화문 일대 탐방기

세종 탄생지, 주시경 마당, 한글학회 등 ‘곰비임비’ 다가와

“종로, 대한민국 넘어 세계 속 한글 중심지 될 수 있을 것”

한글 창제·반포한 경복궁에서 출발

한글가온길에 한글 관련 시설 집중

종로구 “한글 진흥 다양한 사업 진행”

“종로구가 앞으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속의 한글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9월25일 오후. 한글의 창제와 반포 현장인 경복궁에서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이 한 말이다. 방탄소년단(BTS)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일고 있는 한류의 중심에 한글이 있고, 그 한글의 중심이 바로 종로구라는 것이다. 김 원장은 최근 종로구가 의뢰한 ‘종로와 한글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에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해 500쪽이 넘는 두툼한 연구 보고서 작성에 힘을 보탰다.

이날 2020년 ‘574번째 한글날’을 앞두고 김 원장은 보고서에 담긴 광화문 일대 한글과 연관된 장소들을 탐방하기 위해 나섰다. 외국인이나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 등 시민 6명이 동행했다.

첫 장소는 조선시대 법궁인 경복궁이었다. 경복궁이 한글 탐방 첫 장소가 된 것은 이곳이 바로 한글이 창제(1443년)되고 반포(1446년)된 곳이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광화문을 가리키며 “광화문은 교화의 빛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이라며 “그중 가장 커다란 빛은 한글일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빛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세종대왕은 경복궁에 주로 머물면서 침전인 강녕전과 집무실인 사정전,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흠경각 등에서 한글을 비밀리에 구상하고 창제했을 것”이라며 “세종은 창제 뒤 반포 과정에서 정인지 등 경복궁 내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해례본 등을 만들게 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설명을 마치고 경복궁 서쪽 문인 영추문을 나선 뒤 통인동 쪽 자하문로에 있는 ‘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 앞에서 멈췄다.

김 원장은 “지금은 복개돼 차들이 다니고 있지만, 조선시대 이곳은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하천인 백운동천이 흐르던 곳”이라며 “세종대왕은 냇물이 흐르던 이 근처에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397년에 태어났다”고 설명했다. 작은 표지석 옆에 선 김 원장은 “앞으로 세종대왕 생가터 복원 등을 통해 세종대왕 탄생지인 이곳 종로에서 한글과 관련한 더 많은 행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세종 예술의 정원 한글 조형물

이어 일행이 자하문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 도착한 곳은 경복궁역 7번 출구 ‘한글가온길’ 표지판 앞. 한글가온길은 2013년 서울시가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조성한 길이다. 가온은 ‘가운데’ ‘중심’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시작해 한글회관까지 이어지는 새문안로3길을 따라 조성된 가온길에는 다양한 한글 관련 이야기가 가득하다.

한글가온길 새김돌에서

김 원장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새문안로3길을 따라 남쪽으로 100m쯤에 있는 오피스텔 ‘용비어천가’ 정문. 이곳이 바로 ‘언문’ ‘가갸글’ 등으로 불리던 한글에 ‘한글’이라는 제 이름을 만들어준 주시경(1876~1914) 선생이 머물며 활동했던 집터다. 주시경 선생은 오늘날 한글 맞춤법의 기초를 세웠고, 제자들을 길렀다. 1914년 그가 39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이 그 뜻을 이어 1919년 조선어연구회(1931년 조선어학회로 바뀜)를 만들고 1921년부터 본격화해 조선어 사전 편찬 등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기 위해 노력했다.

주시경 집터에서 다시 50m 정도 내려가자 ‘주시경 마당’이 일행을 반긴다. 주시경 마당에서 한글 자모로 만든 네모틀 모양의 조형물에 새겨진 주시경 선생 부조와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의 부조를 만난다. 헐버트 부조상 위에 새겨진 “한글과 견줄 글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는 글귀는 그의 한글 사랑을 대변한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립학교인 ‘육영공원’ 영어 선생님으로 1886년 한국에 온 헐버트는 곧 한글의 우수성에 매료돼 1889년 한글이 과학적인 문자라는 내용의 글을 미국 신문에 투고하고,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에서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인류사에서 빛나는 업적”이라고 칭송하는 등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맨 오른쪽)이 9월25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 한글 글자마당에서 한글 탐방 참가자들에게 광화문 일대 한글 관련 시설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또 헤이그 밀사들이 헤이그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동행하는 등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큰 관심과 도움을 주었다.

주시경 마당을 떠나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다가가면 조선시대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을 맡아 보던 기관인 ‘사역원터’ 표지석이 눈에 띈다. 김 원장은 “사역원의 활동이 훈민정음 반포 뒤 크게 늘었는데, 이 또한 한글 사용으로 이전보다 외국어를 쉽게 배울 수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짚었다.

사역원터 표지석 주변에는 ‘평화’와 ‘화해’라는 의미를 10여 개 문자로 표시한 단어들이 마치 잎사귀처럼 달린 나무 조형물을 만나게 된다. 2014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문자 심포지아 2014’를 기념하는 조형물 ‘평화와 화해의 나무’다.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당시 대회에서 채택된 ‘서울 문자선언’에서는 “한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신의 문자를 빼앗기게 되면 사회적 참여에 크게 제한을 받는다”며 “문자를 빼앗는 것은 인간성의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일제강점기 탄압으로 소멸 위기에 처했던 한글의 운명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다.

그래서인지 ‘평화와 화해의 나무’를 떠난지 5분 만에 외교부 청사 옆 세종로공원에서 만나는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이 더욱 반갑다.

현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는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 중심으로 만든 조선어연구회에서 1926년 ‘가갸날’(1928년부터 ‘한글날’)을 제정했고,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만드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김 원장은 그러나 “일제가 1938년에 우리말 사용 금지를 명하고, 1940년 창씨개명 단행, 1941년 보안법 제정을 하면서 조선어학회를 옥죄어왔다”고 했다. 실제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1942년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대거 구속됐다. 당시 회원 중 이윤재·한징 두 분이 옥사할 정도로 일제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에 대한 탄압은 가혹했다.

숙연한 마음을 가슴에 안고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을 바라보면서 세종문화회관 쪽으로 조금 이동하니 ‘한글 글자마당’에 다다른다. 김슬옹 원장은 “한글은 가장 많은 음을 표기할 수 있는 문자”라며 “한글 글자마당에는 한글로 표현할 수 있는 1만1172자를 모두 돌에 새겼다”고 설명했다. 새겨진 글자들은 재외동포, 다문화가정, 국내 거주 외국인 등을 포함한 전 국민 중 공모로 선정된 이들이 각각 한 글자씩 직접 쓴 것들이다.

김 원장이 1만1172자 중 사전 배열 순으로 맨 마지막 글자를 찾아보라는 즉석 문제를 내자 참가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러나 이곳저곳 살펴보던 참가자들은 곧 바닥에 새겨진 글자 ‘’을 찾아냈다.

참가자들은 다시 한글가온길로 돌아온 뒤 마지막 목표 지점인 한글학회와 한글가온길새김돌로 향했다. 김 원장이 한글학회 앞에서 “한글학회가 건물 임대료로 운영하는데 코로나 사태로 임대가 잘 안돼 걱정”이라고 말하자 모두 안타까운 마음이 되기도 했다.

김슬옹 원장과 함께한 광화문 한글 탐방을 마친 뒤, 국내 거주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글 교육 등을 하는 ‘한국외국인지원센터’ 정혜영 교육이사는 “오고 가며 그냥 지나치던 한글 관련 시설 등을 찬찬히 살피니 한글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 같다”며 “종로구에서 이런 한글가온길 탐방 프로그램을 정례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함께 탐방에 참여한 종로구 홍보팀 심아영 주무관은 “종로구에서는 이미 기존의 골목길 탐방 코스에 한글가온길 추가와 해설사 운영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종로구는 김슬옹 원장 등에게 의뢰한 ‘종로와 한글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 결과 보고서를 올해 안으로 책자로 만들어 전국 공공도서관에 배부할 예정이다. 또 인사동·북촌 등 문화 특화지역 내 한글 간판 달기 사업을 확대 추진하고, 종로구 새 청사 건립 때 직원·주민 휴게 공간에 한글 디자인을 활용하는 등 한글 사용을 넓혀갈 예정이다. 종로에서 발한 ‘한글 사랑의 빛’이 광화문과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길 기대해본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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