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서울은 미술관’…공공미술 통해 꿈틀대는 미의 생태계 일궈

등록 : 2020-08-20 15:14 수정 : 2021-01-22 17:09

크게 작게

4년째 ‘비전 2030, 문화시민도시 서울’ 사업 진행

도시 전체를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꾸미고 있어

중랑구 용마폭포공원에 설치된 공공미술 작품 ‘타원본부’.

용마폭포공원 ‘타원본부’…중랑구 토박이 이원복씨 사연에 예술 보태


시민 이야기가 씨앗이 된 첫 번째 사례

전문 작가 중심 벗어난 공공 미술 모범

광화문 서울시티투어버스 매표소 주목


미술관 밖에 있는 평범한 떡갈나무도 예술품이 될 수 있다면 어떨까. 독일 카셀에서 5년마다 열리는 세계적인 현대미술 전시회 ‘카셀 도쿠멘타’에서 벌어진 일이다. 1982년 제7회 카셀 도쿠멘타가 개막하던 날, 독일의 개념미술작가 요제프 보이스(1921~1986)는 떡갈나무 한 그루를 예술 작품으로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당시 그는 독일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앞에 떡갈나무를 한 그루 심으며 현무암 기둥 6999개도 함께 세웠다. 그러면서 “현무암을 누구나 들고 나갈 수 있다. 대신 그 자리에 떡갈나무를 심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어떻게 됐을까? 이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떡갈나무 심기에 참여한 끝에 약 5년 만에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주변은 떡갈나무 7천 그루로 가득한 녹지대로 변신했다. 한 예술가의 상상력이 담긴 작품에 주민 참여가 더해져 도시 산림화를 이뤄낸 것이다. 예술이 미술관 밖으로 나와 대중과 소통한 결과다.

서울시도 2016년부터 비슷한 노력을 해왔다. 같은 해 6월 문화 분야 중장기 계획으로 발표한 ‘비전 2030, 문화시민도시 서울’의 하나인 공공미술 사업 ‘서울은 미술관’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서울은 미술관’ 프로젝트는 ‘예술이 삶이 되는 도시, 생동하는 도시, 미술로 아름다워지는 도시 서울’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추진됐다. ‘도시’와 ‘시민’이라는 주제로, 궁극적으로 도시에 변화를 주는 예술,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미술을 선보이겠다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도시 전체를 사실상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만들겠다는 얘기다.

지난해 10월 서울시 중랑구 용마폭포공원에 설치된 공공미술 작품 ‘타원본부’가 대표 사례다. 절벽과 폭포 아래에 놓인 타원형 광장인 ‘타원본부’는 용마폭포공원 폭포수 저수조 안에 설치된 가로 30m, 너비 20m의 타원형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특히 바닥이 원의 중심을 향해 완만하게 기울어져 있어 시민들이 이곳에 누워 한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설계됐다. 공공미술 작품 위를 자유롭게 거닐고 눕기도 하며 때로는 걸터앉아 물장구도 칠 수 있다.

이 작품이 공공미술로서 가치를 갖게 된 이유는 바로 시민의 추억에 예술을 더한 ‘공공미술 시민 아이디어 구현 프로젝트’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공공미술이 공공기관 주도로 공모·입찰을 거쳐 일방적으로 진행된 것과 달리 ‘타원본부’는 시민이 직접 참여한 결과물이다. 2018년 7월부터 대상지, 시민 스토리, 미술작가 공모라는 경쟁 방식을 거쳐 선정했다.

이 과정에서 중랑구 토박이 이원복씨의 사연이 선정돼 ‘타원본부’의 탄생에 영감을 줬다. 이씨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불의에 맞서 싸우는 ‘태극 13단’을 결성하고 용마산 채석장을 아지트 삼아 활약했던 추억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지현 작가가 ‘타원본부’를 완성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 있을 아지트라는 추억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했다. “하나의 예술품에 그치지 않고 시민이 참여하고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했다”는 게 정 작가의 설명이다.

용마폭포공원은 1961~1988년 서울시 도로 건설 등에 필요한 골재 채취장으로 이용되다 1993년 공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는 “‘타원본부’를 통해 자연환경에 스며든 특별한 미술작품을 많은 시민이 관람하고 즐기길 바란다”며 “특히 ‘타원본부’는 시민의 이야기가 씨앗이 된 첫 번째 사례이자 기존 전문 작가 중심에서 벗어나 시민 주도형 공공미술로 확대하는 모범 사례라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공공미술은 시민들이 주변 환경을 다양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경험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영구적으로 설치하지 않고 단기간 이벤트성으로 기획된 공공미술 프로젝트도 많아지고 있다. 서울시가 기획한 ‘재미있는 서울’(Fun, Fun한 SEOUL 100) 공공공간 만들기 사업은 디자인을 통해 공공공간에 재미를 부여하고 이를 시민이 직접 경험하며 일상 속 활력을 독려하는 데 목표를 둔 프로젝트다.


녹사평역 지하예술정원 ‘댄스 오브 라이트’.

거울 반사판으로 만들어진 천장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놀 수 있는 버스 정류장(기다림이 있는 광화문 서울시티투어버스 매표소 및 정류소, 2018년 제작),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진입부 녹지 공간에 설치된 무지개색 필름을 붙인 유리 구조물(Illusion Gate, 2019년 제작)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시 디자인정책과가 주관하고 디자인 스튜디오 `커브어소시에이츠’가 디자인한 이 공공미술 작품들은 평범한 ‘기다림’의 공간이었던 정류장, 매표소, 녹지 유휴공간을 이색 예술 체험 공간으로 치환하면서 많은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녹지 공간에 설치된 무지개색 필름을 붙인 유리 구조물 ‘Illusion Gate’.

평범했던 일상에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또 있다. 과거 푸른 풀이 무성한 들판이어서 붙여진 지명 ‘녹사평’(綠莎坪). 용산공원과 남산, 해방촌과 이태원을 잇는 용산구 녹사평역의 빈 공간에 지난해 3월 ‘지하예술정원’이 들어섰다. 시민들의 일상 공간인 지하철역 전체를 공공미술로 바꾸는 새로운 도전이라는 평을 받으며 ‘2019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녹사평역 프로젝트’가 특별한 이유는 빈 곳에 완성된 작품들을 단순히 채워 넣는 방식에서 벗어났다는 것에 있다. 2000년 문을 연 녹사평역은 역 천장 정중앙의 반지름 21m 유리 돔 아래를 긴 에스컬레이터가 가로질러 내려가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역의 지하 1~4층 깊이는 약 35m로 민간 건물 지하 11층에 해당한다. 지하 4층 원형 홀은 600여 개 식물이 자라는 지하 정원을 조성했다. ‘숲’을 테마로 한 설치예술작품도 놓았다. 지하 5층 승강장은 지층의 흐름과 무늬를 표현한 작품이 자리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민이 역 안을 이동하는 동안 ‘빛’ ‘숲’ ‘땅’을 주제로 흐르듯이 연결되는 작품을 통해 미술관에 온 기분을 만끽할 수 있게 만들었다”며 “구체적으로는 지하 1층에서 5층으로 내려가면서 ‘빛과 숲을 지나 서서히 땅속으로 들어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식물상담소, 갤러리, 시민 참여 공간을 조성했다. 다른 역보다 깊고 넓었던 녹사평역은 그렇게 다양한 예술행사가 열리고 시민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났다.

마포구에 있는 친환경 복합문화공간 ‘문화비축기지’와 2018년 김신일 작가가 만든 서울광장의 ‘우리의 빛’도 대표적인 공공미술 작품이다. 시민들이 자신의 일상이 담긴 사진을 모바일 앱으로 올리면, ‘나, 우리, 지금, 여기, 서울, 오늘, 역사’ 문자 형상으로 이루어진 조각에 영사돼 다양한 빛깔로 분할되어 맺힌다. 다채롭게 변화하는 조각상 빛깔은 시민 한 명, 한 명의 삶이 오늘의 서울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상징하는 참여형 예술 프로젝트다.

참여형 예술 프로젝트 ‘우리의 빛’.

2017년 종로구 돈의문박물관마을에 설치된 ‘히어어스’(Here Us)도 시민 참여형 예술품이다. 작품의 상단 거울은 주변의 풍경을 넓은 시야의 이미지로 반사하고, 시민은 모바일 카메라를 이용해 히어어스에 비친 자신과 다양한 구도의 풍경을 담아 #hereus#seoul 해시태그 등으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할 수 있다.

이처럼 ‘서울은 미술관’ 프로젝트는 공공미술을 통해 삭막한 도시 공간에 예술적 상상을 불어넣어, 보다 인간적 정취가 넘치는 아름다운 시민의 삶을 지향해왔다. 살아 있는 도시 속에 의미 있는 장소를 찾아 공공미술의 방식으로 변화를 이끌어 시민 곁에 사랑받는 장소를 만드는 것, 이를 통해 도시와 사람의 관계 맺기 과정을 지나 시민으로 하여금 ‘내가 사는 서울에 대한 애정’을 만드는 공공미술을 실천하고자 하는 게 서울시의 목표라고 한다.

요제프 보이스는 생전에 “미술은 ‘생물’이기 때문에 전시실에 가만히 있지 않고 사회에 나와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서울도 지금 공공미술이라는 생물이 꿈틀대는 미의 생태계를 일궈나가고있다.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