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동촌’은 어떻게 근대화 기지로 변신했나?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대표 주거지 동촌 조명한 ‘연지·효제 새문화의 언덕’ 발간

등록 : 2020-08-06 14:20

크게 작게

창덕궁·종묘 동쪽~낙산에 이르는 곳

효종 태어나고, 하멜이 거주했던 장소

근대엔 선교사 집 7채 함께 들어서고

실업학교 등 설립에 ‘공업촌’ 불리기도

1970년대 봉제인 인력시장이 열리는 주요 장소. 연지동의 주요 상권이였다.



1653년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상인 ‘하멜’이 살았던 곳은 어디일까. 조선시대 한양의 북촌과 함께 대표적인 주거지로 꼽히는 그곳, 바로 ‘동촌’(東村)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과거 도성 안쪽 지역을 방위와 지형에 따라 ‘북촌’과 ‘남촌’, ‘서촌’과 ‘동촌’으로 구분해 불렀다. 최근 이곳 동촌의 역사를 오롯이 담은 보고서가 발간돼 눈길을 끈다. 지난 5월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서울의 ‘동촌’에 대한 지역 조사를 담은 보고서 ‘연지·효제 새문화의 언덕’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2006년부터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라는 이름으로 서울 지역 조사를 지속해왔다. 이번이 33번째 발간한 보고서다.

연지동·효제동에 대한 조사 내용을 주로 담았다. 연지동·효제동은 창덕궁과 종묘의 동쪽에서 낙산 능선에 이르는 동촌에 속한다고 한다. 송인호 서울역사박물관장은 “동촌의 연지동·효제동 지역은 조선시대 수도였던 한양 도성 안이면서도 궁궐과 종묘사직, 관아와 시전이 모여 있는 도심으로부터는 벗어난 한적한 지역이었다”며 “또한 효종이 태어난 곳인 조양루(朝陽樓)와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의 집인 석양루(夕陽樓)가 마주 보고 있는 풍광 좋은 동네로도 유명했다”고 설명했다. 한 예로 조선시대 동촌을 묘사하는 글에서도 주로 조양루와 석양루를 아름다운 경관의 조합으로 표현했다. 18세기 후반 동촌에서 살았던 윤기(1741~1826)라는 사람이 자신의 집을 지으며 쓴 글 ‘화와 상량문: 무명자집’에 따르면 동촌은 숲이 울창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동대문 안에 초가집을 거처로 정했는데, 사람들이 말하길 서울 동쪽 고을에 짙푸른 초목의 기운이 울창하다고들 한다. 동네가 조양루·조양교에 접하니 이름난 정원과 누대가 그림 같고, 땅 이름이 연화방·연화동이니 맑은 물에 뜬 연꽃이라 장식이 필요 없다.” 그에 따르면 현재 동촌으로 불리는 일대는 크게는 서울의 도심에 자리잡고 있다. 이 일대에 해당하는 종로구 연지동·효제동은 종로, 동대문, 대학로와 인접했지만 다른 도심에 비해 다소 한적한 분위기의 동네로 알려졌다. 조선시대 ‘북촌’처럼 한양의 주요 주거지였던 이곳은 근대기에는 정동과 같이 선교기지가 조성된 근대화의 공간으로 거듭나기도 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릴리언 딘, 하트니스 매리언 등 선교사들의 선교사촌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효제동과 충신동 일대 모습으로 가운데는 의열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상옥의 이름을 딴 김상옥로이며, 뒤의 산은 낙산이다.

당시 이들은 신의경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회의 장소로 사택을 빌려주거나 독립운동 서류를 숨겨주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렇듯 동촌의 흥미로운 역사를 담은 보고서 ‘연지·효제 새문화의 언덕’에는 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동촌의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간의 역사를 조망한, ‘동촌의 어제와 오늘’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우선 동촌의 어원은 언제부터였을까? 서울역사박물관에 따르면 동촌은 낙산(타락산) 밑에 사는 인가를 가리키는 말로, 이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됐다. 조선시대에는 수도 한양의 주거지로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 경복궁의 서쪽 서촌, 남산 자락 남촌, 장교와 수표교 일대 중촌이 있었으며, 창덕궁과 종묘의 동쪽을 동촌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 <승정원일기> 1506책, ‘정조 6년 3월23일 조’에도 동촌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경모궁이 위치한 동촌의 연화방 지역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에서, 정조가 경모궁에 참배하러 오다가 동촌이 쇠락한 모습을 보고 “동촌에 ‘금잡’(禁雜, 관계없는 사람을 드나들지 못하게 함) 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 대목이 그렇다. 정조가 쇠락한 동촌의 모습을 보고 한탄했을 정도로, 당시 동촌은 종로에서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길과 종로에서 동소문으로 이어지는 길 인근에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주요 도로들은 동촌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비껴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동촌은 번화함과 가까우면서도 외진 특이한 지정학적 특징을 지닌 곳이었다. 조선시대 ‘붕당(朋黨) 정치’에서 동인(東人)의 발생지도 바로 이곳이었다. 동촌의 인물 중 빼놓을 수 없는 이는 바로 김효원(1542~1590)이다.

김효원이 막강한 인사권을 쥔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심의겸(1535~1587)과 대립하면서 동서 분당이 시작됐다. 이때 김효원이 동촌 연지동에 살았기 때문에 김효원을 따르는 이들을 ‘동인’이라 했고, 심의겸은 서촌 정동에 살았기 때문에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는 명나라 유민과 하멜이 거주했던 명인촌이 자리잡으며 이국적인 터로서 거듭나기도 한다. 효종은 볼모로 지냈던 중국 선양에서 알게 된 왕이문 등 명나라 유민들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와 자신이 사는 어의궁 인근에 명나라 유민이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줬는데 그곳이 바로 명인촌이다. 후에 명인촌에는 1653년 조선에 표류한 하멜이 머무르게 된다.

이후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북장로회의 교회와 선교사들이 이주하며 서양식 이층 주택 7채가 나란히 자리잡아 ‘선교사의 언덕’이라 불렸다. 정동에 터전을 잡고 있던 개신교 북장로회가 경운궁 확장 계획에 따라 터를 대한제국에 매각하고 연지동 구릉지 일대를 매입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이에 따라 1894년 연동교회를 시작으로 1908년에는 효제동 47번지에 1천 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했고 이후 몇 차례 증축과 이주를 거쳐 현재도 같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이밖에도 이 일대에는 1895년부터 정신여학교, 경신학교, 공업전습소, 경성제국대학 등 많은 근대 교육시설이 들어서면서 학생촌·문화촌·공업촌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북장로회 선교기지가 해체되고 그 자리에 한국기독교회관이 들어서게 된다.

해방 이후 연동교회와 이 일대는 유신공화국 시대의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화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이번 조사를 맡은 정수인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 동촌이라 불렸던 연지동·효제동 일대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지만,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위상이 다소 달라졌다. 주로 동대문시장과 대학로 등지가 상권으로 인식되면서 지역 고유의 정체성이 잊히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번 조사를 통해 그간 알려지지 않은 연지동, 효제동의 역사와 지역성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2019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연지·효제 새문화의 언덕’은 서울책방 누리집(store.seoul.go.kr)에서 구할 수 있다. (문의 02-739-7033)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사진 서울시 제공

사진 서울시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