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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노동 10년 50대 남성, 국회 보좌관 되다

등록 : 2020-06-18 14:40 수정 : 2020-06-2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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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박사과정 수료 권병태씨의 파란만장 인생 역전극

‘비정규직 문제 해소 길 모색’ 소명의식에 일용노동 시작

2011년 5월부터 전국의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잡부’로 일했던 권병태씨가 공사현장에서 대형 드릴을 들고 서 있다.(왼쪽) 제21대 국회 개원 직전인 5월27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신당 ‘시대전환’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오른쪽)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권병태씨 제공

지난 2월28일 밤 9시께 서울 노원구 중계동 작은 아파트 앞. 두문불출 칩거하던 권병태(52)씨는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다. 머리도 감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은 부스스한 얼굴로 내다보니 ‘여친’이었다. 권씨가 3주 동안이나 자신의 문자도 ‘씹고’ 연락이 되지 않자 걱정이 된 여친이 찾아온 것이다. 음식 꾸러미를 든 여친은 “내가 오빠에게 힘이 못 되는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렸다. 코로나19 사태로 일용직 노동 일도 완전히 끊겨 생계가 막막해지고,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무기력했던 자신에게 실망한 권씨는 또다시 ‘잠수’를 시도했다.

“이 나이에 정규직이 될 수도 없고, 일용직 10년을 매듭짓는 책 쓰는 일도 잘 풀리지 않다 보니, 못난 남자들이 흔히 그러듯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좋은 남자를 찾아가기 바라는 마음에 여친을 밀어내려고 했어요. 내겐 희망이 없었어요.”

그가 주변 사람과 연락을 다 끊고 히키코모리(고립형 은둔자)처럼 집 안에 처박혀 밖에 나오지 않은 것은 벌써 세 번째였다. 서울대 정치학과 87학번인 그는 6월항쟁 때 당시 1학년 전체 대표로 참가한 운동권 출신이다. 동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남부럽지 않은 학벌을 지녔지만, 그 이후 삶은 한 편의 영화처럼 파란만장하다.

2006년 이혼 뒤 큰 상실감과 자괴감에 빠졌고, 두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와 겹치면서 2011년 5월부터 10년간 건설노동으로 생계를 도모하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여친의 눈물이 너무 마음 아팠던 권씨는 “매주 밑반찬을 들고 망가진 남자를 찾아오는 천사 같은 여친” 덕분에 집 밖으로 나올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마음을 다잡은 권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알게 된 시대전환 조정훈 국회의원 당선자에게 지난 4월 말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예전에 “같이 일해보자”는 언질이 생각나 구직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었는데, 조 당선자는 5월7일 면접 뒤 “다른 데 (보좌관 면접) 가지 마세요”라며 권씨의 손을 잡아주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쉬지 않고 일해야 월 250만원 정도 손에 쥘 수 있는 일용직 10년 ‘잡부’가 연봉 8330만원+알파의 국회의원 수석보좌관(4급 상당)이 된 것이다. 6월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그는 “오늘 4시 반에 일어나서 2시간 산책했는데 정말 행복하고 뿌듯했다”며 활짝 웃었다. 현재 매달 29만4천원씩 54회째 갚고 있는 신용회복위원회의 조정 부채를 연말까지 상환하게 되면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고, 내년 봄엔 빚 없이 떳떳하게 여친과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권씨는 말했다.

권씨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두 여성에게 절실하게 해주고 싶은 게 크게 작용했다. “갑작스레 쓰러진 어머니 소식을 듣고 돌아가시기 전에 양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여친에게는 예쁜 원피스 한 벌 입혀주고 싶었습니다.”

권씨는 2016년에도 ‘잠수’를 탄 적이 있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사춘기 아들(당시 고1)을 때려서 아들이 집을 나간 때였다. 그는 자신에게 실망해서 약 6개월간 혼자 지내며 하루 한 끼 간장만으로 끼니를 때우고 지낸 적이 있다. 그러다 그해 10월 초 딸의 편지를 받고 다시 일어선 경험이 있다. 돈과 쌀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 딸이 즉석밥과 라면, 그리고 손편지 등이 든 상자를 문 앞에 놓고 가지 않았다면 권씨는 고독사로 생을 마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딸의 편지를 읽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세 번의 두문불출과 두 번의 자살 시도, 10년의 건설노동을 거친 고스펙 50대 초반 남자의 인생 역전극은 바야흐로 이제부터 시작인 듯하다.

보좌관 취업 이후 어머니는 건강이 좋아지셨고, 집으로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국회의원 보좌관이 됐다며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다. 사실 권씨의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부인과 이혼한 뒤 아이들 양육권 분쟁 중이던 2005년 9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27개월간 의원 세 명과 일했다. 마지막 의원실에서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수석보좌관과 말다툼 끝에 해고당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권씨는 어린 남매 둘을 혼자 키웠다.

“과거 제가 만난 의원들 중에는 너무 권위적이거나, 생각의 속도가 느리거나, 정치를 이기고 지는 게임으로만 여기는 분도 계셨다”고 회고하는 권씨는 조정훈 의원에 대해서는 “아주 유능하고 깊은 분”이라고 말했다. 조 의원은 자신의 호칭을 ‘의원님’ 대신에 ‘정훈님’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고, 보좌진 9명끼리도 ‘○○님’ 호칭으로 통일시킬 정도로 탈권위적이고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중시한다.

6월2일에는 보좌진 9명 전원이 ‘자기소개’ 기자회견을 했는데, 21대 국회 개원 기자회견 중에서 단연 눈길을 끌었다. 권 보좌관은 그날 기자회견에서 “우리 의원님, 아니 정훈님은”이라고 호칭 실수를 하는 장면이 전국에 방영돼 이곳저곳에서 전화를 받는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10년간 건설 현장 일용직 일을 한 남다른 경험이 국회 보좌관직 수행에 어떤 작용을 할까?

“과거에는 정치적 성공에 대한 꿈이 컸고, 수틀리면 싸우기도 했는데 일용직 10년 동안 웬만한 일에는 인내력이 생긴 것 같아요. 사람이 둥글둥글해진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리 의원실에는 워낙 뛰어난 동료가 많습니다.


“탈권위적인 조정훈 의원과 함께 차별 없는 세상 만들 것”

두 번 자살 시도, 세 차례 잠수 탔지만

일용직도 함께 사는 세상 포기 못해

죽음 앞둔 사람들 전화 상담 활동도

지난 5월27일 제21대 국회 개원에 앞서 여의도 시대전환 당사에서 권병태씨(오른쪽 둘째) 등 조정훈 당선자 보좌진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회의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

제가 일을 제일 못합니다. 저는 파워포인트도 엑셀도 능숙하지 않지만 정수기를 번쩍 들어 올리는 등 힘쓰는 일은 자신 있습니다.” 그는 농담 섞인 말로 자신의 위치를 설명했다.

그가 일용직에 도전한 것은 생계 문제도 있었지만 비정규직 문제 해소에 대한 소명의식도 작용했다.

“일용직에 뛰어들기 전까지 몸을 써서 돈을 벌어본 적은 없었어요. 2011년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기자들이 비정규직 체험을 담은 책을 출간할 당시 사회디자인연구소 연구원 신분으로 일용직을 체험하면서 노동일기를 써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로 10여 차례 연재했어요. 그런데 일이 익숙해지면서 단순 노가다에 재미가 붙어 전국을 돌아다니다보니 10년이 흘렀네요.”

그는 10년을 어떻게 버텼느냐는 질문에 바지를 걷어붙여 굵직한 장딴지 근육을 보여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건설 일용직 현장에서는 깔끔 부려서는 안 되고 더러움과 먼지에 무뎌져야 해요.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잔소리에도 견뎌야 하는데 저는 그게 가능했던 것 같아요.” 43년 동안 일용직 노동을 했던 아버지의 잔향도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파주 엘지 엘시디 공장, 천안역 복합몰, 제주도 영어마을 등 많은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중 바로 옆에서 동료가 떨어져서 죽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고 본인도 왼쪽 팔목 인대가 끊어져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때 진보적이었던 대기업 노조와 민주노총이 기득권화했다는 것을 깨닫고 일용직을 대변하는 정당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공사장 담벼락 같은 곳에서 쉬고 있을 때 아이와 함께 지나가는 부모들이 ‘너도 공부안 하면 저런 사람처럼 된다’고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어요.”

그는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은 아니라고 믿지만, ‘비정규직이어도, 일용직이어도 잘 사는 세상’이라는 자신만의 비전을 다져왔다고 한다. 그리고 조정훈 의원과 함께 직업으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 “5·18은 폭도가 일으킨 것”이라고 믿었던 권씨는 대학 입학 뒤 자연스럽게 운동권에 합류하고 6월항쟁 때는 서울대 1학년 전체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자신을 운동권으로 만든 선배들이 하나둘 운동을 멈추기 시작할 때도 그는 한 학기 학점이 전부 F를 받을 정도로 운동에 매진했다. 옛소련이 붕괴하는 것을 보면서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마르크스의 이상향을 포기했지만 ‘사회적 약자가 잘 살게 되는 세상’을 꿈꾸는 일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조국 파동 당시 옛 일부 운동권 동료·선후배랑 불화를 겪기도 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내 편은 무조건 옳다”는 식의 진영 논리에 큰 실망감을 표시하는 글을 페북에 올렸다가 “페친 끊겠다” “너는 정치적 감각도 없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저의 젊은 시절 우상들이 무너져가는 모습이 슬펐다”고도 말했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남 이야기 들어주기 좋아하는 권씨에게 페이스북은 또 하나의 소통 공간이다.

“저의 아픔을 페이스북에 가감 없이 써왔는데 가정 가진 여성분들 전화가 많았고 대부분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많이 이야기했어요. 어떤 분과는 24시간 동안 통화하기도 했어요. 제가 오지랖 넓은 짓을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제게 여친이 생기고 국회의원 보좌관이 된 뒤에는 그런 전화가 거의 없어요. 더는 ‘노가다 중년 싱글남’이 아니어서, 즉 저에게서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가봐요.(웃음)”

조정훈 의원에게 국회 출입기자들이 “권씨를 보좌관으로 채용한 이유”를 묻자 조 의원은 “본 적도 없는, 자살을 앞둔 분들이 병태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 싶다고 연락해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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