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조지훈, 윤이상, 이태준, 한용운의 동네

유영호의 우리 동네 어슬렁 산책ㅣ성북동 일대

등록 : 2019-08-16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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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립박물관장 최순우 집

2004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

길 건너편에 조지훈이 32년 살아

성북천 사이 두고 윤이상과 친교

최대 사립박물관 간송미술관

<훈민정음 해례본> 등 수많은 보물 수장

<문장강화> 이태준의 수연산방이 근처

수연산방 위로는 한용운의 심우장


성북동 일대 지도

성북동은 단일 동으로는 무척 큰 면적이다. 그 한가운데로 성북천이 흐르고 있지만 한성대입구역부터 성북동 쪽의 물길은 모두 복개되어 옛 물길을 볼 수 없이 그저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상상할 뿐이다. 본래 성북동은 그저 한양도성 밖의 아늑한 계곡이었지만 삼청터널이 뚫려 도심과 연결되면서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자신의 아늑한 보금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럼 이제 아늑했을 지난날의 계곡을 상상하며 북쪽으로 긴 걸음을 시작해보도록 하자.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는 동네라서 ‘성북동’이라 한 이곳은 ‘혜화문’을 시작으로 한양도성 밖으로 맞닿아 있는 곳이다. 혜화문은 본래 홍화문이라 하였는데, 창경궁이 건립되고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하면서 지금의 혜화문으로 바뀌었다.

이 혜화문 바로 옆에는 현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가 있는데, 이곳은 1940년 지은 목조건물로서 1981년부터 서울시장 공관으로 쓰다가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켜려 했던 박원순 시장이 공관 용도를 포기하고 현재처럼 쓰고 있다.

그리고 나는 한양도성 성벽을 따라 걸어가다 한국내셔날트러스트가 2002년에 사서 2004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한 한옥에 들렸다. 1930년에 지은 건물로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한 최순우가 살던 곳이다. 안마당에서 집을 쳐다보면 ‘문을 닫아 거니 곧 깊은 산속과 같다’는 뜻의 ‘杜門卽是深山’(두문즉시심산)이라 쓰인 편액이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집을 나서 큰길로 나가니 건너편은 성북구청에서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32년 동안 살았던 집터 앞에 ‘방우산장’을 꾸며놓았다. ‘마음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의미로 조지훈은 자신의 거처를 방우산장이라 일렀다고 한다.

이곳에서 성북천을 사이에 두고 인근에 현대음악의 세계적 거장 윤이상이 1953년 이후 살며 당시는 고려대 교수였던 조지훈과 더불어 친교를 나누었다. 이런 친교 속에서 탄생한 것이 지금의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의 고려대 교가였으니, 1967년 동백림사건을 통해 빨갱이로 몰린 윤이상의 노래를 교가로 부른 고려대생들은 ‘그 느낌이 어땠을까’라는 짓궂은 상상을 해본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 가옥.

북쪽으로 오르다보면 누에신의 황후 서릉에게 제를 올리고, 왕비의 친잠례를 했던 ‘선잠단’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 성북초 담장을 따라 들어가면 국내 최초, 최대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이 있다. 이곳에 수많은 국보와 보물이 있지만 단연 이곳을 빛나게 하는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이것을 일제강점기에 간송 전형필이 수집해 만천하에 공개하면서 한글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자료가 된 것이다.

이곳에서 조금 오르면 이제는 너무도 알려진 상허 이태준의 집이 ‘수연산방’이란 찻집으로 개방돼 있다. 일제강점기 “상허 산문, 지용 운문”이라 할 정도로 산문의 최고 실력가였고, 1939년 <문장>에 연재돼 출간된 <문장강화>는 지금도 산문을 쓰는 데 기본지침서 노릇을 하며 국문학도들의 필독서이다.

현재 한양도성안내소로 쓰이는 옛 서울시장 공관.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전라도 장수 이씨인 이태준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경기도 장기 이씨로 본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5·16쿠데타에 적극 참여했던 38사단장 이규삼이 강원도지사를 하면서 경상도로 집중된 쿠데타세력의 인적 구성을 보며 자기 조상의 한 분을 떼어 장기 이씨를 새롭게 만들며 본을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바꾼 것인데, 그 조상의 후손에 이태준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북으로 간 이태준은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장수 이씨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분단도 모자라 지역갈등까지 겪어야 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느끼게 해준다.

수연산방 위로는 만해 한용운의 북향집 ‘심우장’이 있으며,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성북동 부촌이 펼쳐진다. 이 일대는 약 11만 평에 해당하는 성북동 330번지다. 전후 동작동에 국군묘지가 들어서면서 가등기 상태의 토지를 교보그룹 신용호 회장이 토지 사기꾼과 협잡하여 원주인의 토지를 편취하였고, 국군묘지가 들어서면서 그 토지는 수용되어 현재의 성북동 330번지를 대토로 받았지만, 지금은 그 후손들에 의해 수십 년이 지난 아직도 소송에 휩싸여 있는 그런 곳이다.

1970년 삼청터널이 뚫리면서 심산유곡이었던 성북동은 그야말로 새로운 부촌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에는 교보그룹 관련 주택들뿐만 아니라 현대그룹의 여러 계열사 사장들 집이 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재벌과 연예인의 집도 있다. 한편 삼청터널 바로 앞에는 1970년대 3대 요정의 하나였던 ‘삼청각’이 지금은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이곳 성북동 330번지를 벗어나면 서울의 3대 요정 ‘대원각’에서 시인 백석의 사랑을 간직한 채 사찰로 변신한 ‘길상사’가 있다. 1936년 권번 기생으로서 백석과 동거한 김영한은 몇 년 뒤 백석 부모의 반대로 헤어져 그 뒤 영영 못 만난 채 이곳 대원각에서 독신으로 살다 수천억대에 이르는 이곳을 조계사에 공양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다 논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이곳은 본래 해방 정국에서 박헌영의 별장으로 쓰이던 곳이고, 1949년 관리인 김소산이 체포되면서 새끼 기생 김영한에게 넘어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품고 있는 절임은 틀림없다.

글·사진 유영호

<서촌을 걷는다> <한양도성 걸어서 한바퀴> 저자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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