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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청장의 베트남 딸들 “과거는 과거, 지금이 중요”

등록 : 2018-10-11 15:37 수정 : 2018-10-11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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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2011년 이후 퀴논시 출신 여학생 7명 숙대 유학 지원

성장현 구청장, 스키장행 주선·명절 같이 보내기 등 보호자 자처

지난 9월30일 오후 용산구 이태원의 ‘퀴논 거리’에 있는 베트남 풍경 벽화 앞에서, 성장현 용산구청장(맨 왼쪽)이 “베트남 딸들”이라고 부르는 숙명여대 유학생들, 용산구에 파견된 퀴논시 공무원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 두 번째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팜휜이콴(25·숙대 경제학과 졸), 쩐티짜미(35·파견 공무원), 응우옌누응우옛(20·숙대 홍보광고학 1), 반빈하오(34·파견 공무원), 레티호젭(20·숙대 경제학 2), 판티응옥부이(19·숙대 국제언어문화교육원), 응우옌김한(21·숙대 경제학 2).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한국 체류 중 매년 겨울철이면 스키장에 간 것이 기억에 남아요.”

지난해 숙명여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베트남 여성 팜휜이콴(25)은 지난 5년간(2012년 3월~2017년 2월) 유학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용산구청의 지원으로 유학 시절 내내 해마다 겨울 스키장에 간 일을 꼽았다.

지난 9월28일 오후 용산구청 9층 총무과 회의실. 1996년부터 시작된 용산구-베트남 꾸이년(퀴논)시 도시 교류의 1호 사업인 ‘퀴논시 우수학생 한국유학 지원사업’의 하나로 용산구 내 숙명여대에 유학 온 베트남 여성 5명과 퀴논시에서 용산구에 파견 온 베트남 공무원 2명이 <서울&>의 요청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2017년 2월 졸업 뒤 퀴논시로 돌아가 용산국제교류사무소에서 1년 반 근무하다 한국에서 직장을 구하기 위해 최근 서울로 돌아온 팜휜이콴의 말에 나머지 베트남 유학생 4명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의 나라에서 온 베트남의 젊은 여성들에게 자국에서는 맛볼 수 없는 눈 경험은 무엇보다 강렬한 한국 체험으로 남은 모양이다.

베트남 유학생들의 스키장행은 용산구-퀴논시 교류 사업을 이끌어온 성장현 용산구청장의 주선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한국 드라마에서 보던 하얀 눈이 내리면 어떤 느낌일까, 촉감은 어떨까’ 하는 등 많은 상상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겨울에 한국으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베트남 사람 중에는 스키장으로 가는 커플이 많다고 해요. 우리 딸들에게도 그런 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어요.” 성 구청장은 베트남 유학생들을 ‘딸’이라고 불렀다.

팜휜이콴은 2012년 겨울 처음으로 스키장에 다녀온 뒤 힘들어 다시는 안 가겠다고 했다가 성 구청장에게 “어려움을 겪어봐야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다”며 혼이 났다고 한다. 성 구청장은 입학·졸업 때는 물론이고 설·추석 때면 집으로 학생들을 불러 음식을 나눠 먹고 덕담도 건네고 용돈도 쥐여준다고 한다. 또한 분기별로 한 번씩 학생들과 저녁 식사도 같이할 만큼 각별히 챙기고 있다. 용산구에 따르면 지난 9월24일 추석 당일에도 유학생 4명 전원을 집으로 불러 유학 생활에 대한 고충도 듣고 한강 둔치를 같이 산책했다.

그는 ‘베트남 딸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한다고 했다. “한국은 놀기 좋잖아요. 자칫 유학 생활 중 노는 데 치중하다보면 나중에 베트남에 돌아가서 불행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한-베트남의 가교자, 민간 외교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베트남 학생들의 일생을 담보하는 일 자체가 자칫하면 죄가 될 수도 있다면서 “앉으나 서나 어깨가 무겁고 빗나갈까 걱정된다”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베트남 학생들의 유학 생활을 보면 그의 걱정은 기우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2011년도 1호 유학생 부이티리리는 2016년 졸업한 뒤 퀴논시의 용산국제교류사무소 근무를 거쳐 2017년부터 씨제이(CJ) 빈딩성 비나사료공장 인사부에서 근무한다. 2호 유학생 팜휜이콴도 학점을 4.5만점에 평균 4.28을 받을 정도로 공부에 집중했다. 3호 유학생 보티홍프엉도 지금 베트남 해양수산부에서 일한다. 나머지 재학생들도 퀴논시의 레꾸이돈 영재고 출신으로 숙대 경제학과와 홍보관광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며 유학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팜휜이콴은 앞으로 베트남에 진출하려는 한국 기업에 취업해 “한국 유학 체험과 한-베트남 교류 사업의 경험을 살려서 베트남 경제 발전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다른 숙명여대 유학생들도 한국장학재단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자신들이 받은 혜택과 유학 경험을 나누고, 나아가 ‘용산구-퀴논시’ 교류 사업을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퀴논·’ 용산, 맹호부대 악연 딛고 22년간 교류

성 구청장, 퀴논 13회 방문 초석 다져

올 4월 베트남 주석 우호훈장 수상

용산구-퀴논시 교류 사업은 월남전 당시인 1965년 한국 맹호부대가 주둔한 땅이 퀴논이고, 맹호부대 본부가 있던 곳이 용산이라는 악연(?)을 인연 삼아 시작됐다. 맹호부대는 1973년 철수 전까지 11만 명이 투입돼 17만5107회 작전이 펼쳐졌다. 작전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많이 희생돼 퀴논시의 옛 작전 지역에서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2016년 11월 퀴논시의 안푸틴 국제무역지구 중심가에 ‘용산거리’(길이 500m, 폭 22m)가 조성되고, 그곳에 교류 20주년 기념비를 세울 정도로 두 도시의 오랜 풀뿌리 교류는 한-베트남의 우호 증진의 상징처럼 떠오르고 있다.

1996년 구의원 시절 처음 방문한 이래 22년간 지금까지 모두 13차례 퀴논시를 방문한 성 구청장은 한-베트남 관계 개선에 초석을 놓은 공로로 지난 4월 베트남 정부로부터 ‘베트남 주석 우호훈장’을 받았다. 국제도시외교 분야에서 기초단체장이 이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 구청장에 대한 베트남 정부의 공적 발표문에는 유학 사업 등 교육 분야 지원 외에도 △퀴논시병원 백내장센터 장비 지원과 의료기술 전수△저소득층과 라이따이한을 위한 사랑의 집짓기 △이태원에 퀴논 거리 조성 △퀴논 시내 용산구국제교류사무소 설립과 한국어 교실 운영 △용산구-퀴논시 공무원 교환 프로그램 운영 등을 공적 사항으로 꼽았다.

성 구청장은 여러 교류 사업 중 ‘퀴논시 우수학생 한국 유학 지원’ 사업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유학생에게 “서로 죽고 죽이는 원수 관계였던 과거의 아픔을 딛고, 양국 간 평화 행복의 전도사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했다. 학생들도 너나없이 과거는 과거라고 말했다. 올해 유학 온 판티응옥부이(19·숙명여대 한국어학당)는 한국과 베트남의 아픈 과거사에 대해“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이라며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였다. 역사 문제 신중하던 판티응옥부이는 한국과 케이팝, 박항서 감독에 대해서는 신이 난 듯 적극적으로 발언을 이어갔다. 유학 전 2년 동안 퀴논시의 한글교실인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며 아이돌 중에서 ‘갓세븐’을가장 멋지다고 했다.

팜휜이콴은 “(베트남) 역사책에서 (한국군과 관련된 사항)은 안 다뤄 젊은 사람들은 아픈 과거를 잘 모르는 편”이라며 “나도 교류 사업에 참여하면서 ‘한국군이 미국의 요청으로 참전했다’는 호(찌민) 주석의 말을 듣고, 한국도 일종의 피해자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 5월 용산구청에 파견돼 연수 중인 퀴논시당위원회 소속 공무원 반빈하오(34)는 “용산구와 퀴논 관계는 잘 몰랐는데 2016년 20주년 행사로 깊은 인연을 알게 돼 교류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한국의 행정 시스템을 배우고 싶은데, 무엇보다 쓰레기 분리수거 방법은 퀴논시에도 적용하고 싶다. 퀴논시는 아직 발전하는 젊은 도시인데, 여행지로 베트남 전국에서 뜨고 있다. 만약 쓰레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여행객에게 좀더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같이 연수 중인 쩐티짜미(35)는 “한국 공무원의 민원 접수와 처리 등 일 처리 방식과 홍보 분야에 관심이 있다” 한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과 한국은 사회체제가 다른데, 행정 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한국은 발전된 나라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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