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저출생’이라고 쓰는 이유

기고ㅣ강경희 서울시여성가족재단 대표이사

등록 : 2018-08-1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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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2일 박원순 서울시장은 민선 7기 서울시장 취임사에서 ‘저출산’ 대신 ‘저출생’이란 단어를 썼다. “저출산(아이를 적게 낳는다)이 인구 감소 문제의 책임이 자칫 여성에게 있는 것으로 오해시킬 소지가 있으니 저출생(아이가 적게 태어난다)으로 바꿔 쓰자”는 한 시민의 제안이 그 시작이었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지난 7월1~7일 성평등 주간을 맞아 저출산을 비롯해 시민이 제안한 대표적인 성차별 언어 10개를 발표했다. 그에 앞서 약 2주 동안 ‘단어 하나가 생각을 바꾼다’는 주제로 생활 속에서 흔히 쓰는 성차별 언어를 시민이 직접 바꿔보는 캠페인을 열었다. 예상보다 많은 시민이 참여한데다 ‘생활 속 성차별 언어’에 대한 시민의 높은 의식에 매우 놀랐다. 해당 단어를 바꾸고 싶은 이유를 읽으면서 무심코 쓰던 단어가 어떤 뜻을 가지는지 새삼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주관식 방식의 조사인데도 공통된 의견이 많아 대표적 성차별 단어들을 쉽게 선정할 수 있었다. 시민 의견 608건 가운데 직업을 가진 여성에게 붙는 ‘여’자를 빼자는 제안이 100건으로 제일 많았다. 여직원, 여교수, 여의사, 여비서, 여군, 여경 등의 용어를 직원, 교수, 의사, 비서, 군인, 경찰 등으로 바꿔 부르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에게는 ‘남’자를 붙이지 않는데, 여성에게는 ‘여’자를 붙이는 경우가 흔하다. 마찬가지로 여자고등학교의 학교명에만 들어가는 ‘여자’를 빼고 ‘○○고등학교’로 학교명을 바꾸자는 제안도 많았다.

두 번째로 많은 의견(50건)은 일이나 행동 등을 처음 한다는 의미로 앞에 붙이는 ‘처녀’를 ‘첫’으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처녀작, 처녀출판, 처녀출전이란 말은 있어도 총각작, 총각출판, 총각출전이란 말은 쓰지 않지 않기 때문에 그냥 첫 작품, 첫 출판, 첫 출전으로 바꿔 쓰면 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모차’를 ‘유아차’로 바꿔 말하자는 제안이었다. 한 시민이 “아빠는 유모차를 끌 수 없나요? ‘어미 모(母)’자만 들어가는 유모차(乳母車)는 평등 육아 개념에 반하니 아이가 중심이 되는 유아차(乳兒車)로 바꿔주세요”라고 요청했다. 자문위원회 국어·여성계 전문가조차 그 의미를 깊이 생각지 않았던 용어였다.

이 밖에 성범죄 등에 악용되는 ‘몰래카메라’를 범죄임이 명확한 ‘불법 촬영’으로, 가해자 중심적 용어 ‘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복수 포르노)를 ‘디지털 성범죄’로, 그녀’를 ‘그’로, ‘미혼’을 ‘비혼’으로, ‘자궁’(子宮)을 ‘포궁’(胞宮)으로 바꾸자는 제안이 선정됐다.

많은 분이 성차별 언어로 가족 관련 호칭을 지적했지만, 대체 용어가 마땅치 않아 이번에 선정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일상용어 가운데 우리도 의식하지 않고 쓰는 가부장적 표현이 많다. ‘도련님, 서방님, 아가씨’ 등 결혼 뒤 남편 쪽 친척들만 높이거나 다르게 부르는 용어들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등 친가와 외가를 구분하는 용어들이다. 바꾸고 싶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대표 성차별 언어로 선정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시민과 전문가와 함께 의견을 나눠보고 대안을 찾아볼 예정이다.


“한마디 말이 세상을 바꾸는 시작일 수 있습니다.” 박 시장이 7월3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글이다. 단어 하나가 생각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면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습관처럼 쓰던 성차별 언어를 쓰지 않는, 이 작은 시작이 성평등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지난 7월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바깥벽에 전시된 성평등·성차별 언어. 서울시 제공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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