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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도 옥탑방의 반바지 아저씨, 동네 이장 같았다

정릉동 청수골 주민대표 박 시장 심야 면담기

등록 : 2018-08-09 15:28 수정 : 2018-08-10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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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동 차고지 지하화 사업 관련

주민들 자발적 의견과 요청 모아

시장 면담 위해 백방으로 뛰던 중

옥탑방 한 달 살이 소식에 ‘환호’

몇 번의 시도 뒤 면담 시간 잡혀

팽팽한 대화 속 주민 의견 경청

박 시장 “진행 일단 중지” 선언에

“무더운 기온이 쭉 내려가는 느낌”


지난 1일 밤 성북구 정릉동 청수골 주민대표들이 박원순 서울시장(맨 왼쪽)의 임시 거처인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으로 찾아와 이야기하고 있다.

옥탑방 앞 평상에는 선풍기가 몇 대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중에는 고장이 나서 멈춘 것도 있었다. 비서관들은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수첩에 받아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부인 강난희 여사는 수박 가득 담은 쟁반을 들고 나오고, 박 시장은 옥상 난간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으니 안쪽으로 붙어앉으라고 연신 일깨워주었다.

성북구 정릉동 청수골(옛 청수장 앞 마을) 주민대표들은 서울시가 시행하는 시설에 대하여 주민들의 의견과 요청이 있음을 전하기 위해 박 시장이 잠시 기거하는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을 지난 1일 방문하였다. 면담 과정은 쉽지 않았다. 주민대표들은 며칠 전부터 시장의 거처를 사전 답사하고 시장 퇴근 후 시간에 들러 대문 앞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상습 시위꾼들의 거친 골목 점거로 퇴각하기도 했고, 다른 방문자들이 있어 비서진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돗자리와 간편 음식을 준비해 와 대문 앞에서 시장님 나오실 때까지 밤을 새우겠다며 둘러앉기도 했다.

만남의 시간이 잡혔다. 8월1일 밤 9시 반에 만날 수 있다고 했지만, 30분 전에 도착했다. 조마조마하며 기다렸다. 혹시 무슨 돌발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정확히 9시 반이 되자 대문은 열렸으나 조금만 기다려달라 했다. 앞서의 방문객들(모 방송국 인터뷰)의 장비와 인원들이 나가고 정리를 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10시가 다 되어 시장과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화는 1시간 정도였지만 너무 짧게 느껴져 아쉬움도 있었다.

그간 정릉동 청수골 주민대표들은 시장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시청 홈페이지(누리집)에 들어가 작전을 짜듯 돌아가면서 ‘시장과의 데이트’를 신청하기도 했고 비서실에 전화하여 일정을 잡아주기를 탄원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박 시장이 삼양동 옥탑방에서 한 달 동안 주민과 함께 살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고 환호를 질렀다. 청수골과는 불과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이니 방문하여 정릉동 주민들의 요청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였다.

정릉동 청수골은 옛날에는 이름난 유원지였고 시민들의 휴식처였다. 그래서 노선 좋다는 시내버스 종점이 3개나 있고, 10여 년 전에는 서울시가 토지를 확보하여 하나를 더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만든 이 땅은 버스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종점이 아니라 타지를 오가는 시내버스가 잠만 자고 가는 차고지였다. 서울시는 3년 전부터 이 차고지를 지하화한다면서 지상에는 멋진 문화시설을 지어 주민들의 생활 문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홍보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반응은 썩 좋지 못했다.

이제 막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아이를 둔 청수골의 한 여성은 아이가 자전거를 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영도 가르치고 싶었다. 플라스틱 놀이터가 아닌 모래와 잔디가 깔린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 싶었다. 어느 날 동네 담벼락에 그림 한 장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둘러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것은 이 버스 차고지를 지하화하고 지상에는 문화 시설을 짓는다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너무 허접하였다. 아니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은커녕 군대 막사나 피난민 수용소 같은 작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앉은 그림이었다.

그 여성은 이 공간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마당이라도 넣을 수 없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구청에 정보공개 청구를 하고 구청과 시청에 의견을 올렸다.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확보된 도면을 분석하기도 했다.

이렇게 1년을 보내면서 그 여성은 마을의 주민모임 대표들의 회의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의견이라면서 놀이마당 이야기를 하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마디 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많은 호응 의견이 터져나왔다. 자기 아이만의 육아가 아닌, 마을의 현안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주민들은 박 시장이 8년째 하는 도시재생사업도 주민의 발상으로 시작해달라는 것이었고, 그것이 마을 민주주의 실천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다. 마을 계획도 마을과 골목에서 학식 높은 전문가들만이 아닌 주민의 손과 발로 출발할 수 있음을 실천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정릉 공영차고지 건립 문제와 같은 작은 일에서 시작되고 있음도 말하고 싶었다.

지난 1일 밤 성북구 정릉동 청수골 주민대표들이 박원순 서울시장(뒷줄 오른쪽 셋째)의 임시 거처인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에서 대화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시장은 1천만 도시의 수장이라기보다는 작은 동네 이장처럼 대화에 응해주었지만 자신의 입장도 견지했다. 전면적인 거부라면 이야기 진행이 어렵다고까지 했다. 우리는 주민들의 대표이지 우리 의견이 아님을 말하고, 설문지에 나타난 주민들의 의사를 중심으로 시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것이 시장이 옥탑방에 들어와 주민과 소통하겠다는 취지가 아닌가 물었다.

팽팽한 대화는 주민대표들의 말을 끝까지 듣고, 준비해온 자료를 살피고, 나머지 자료는 보내달라는 말로 풀어져갔다. 충분히 검토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일의 진행은 우선 중지시키겠다고 했다. 순간 주민대표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삼양동 옥탑방 옥상 평상에 앉은 청수골 주민대표들은 시장의 진지한 모습에 39도의 기온이 쭉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동네 아저씨와 진배없는 반바지 아저씨는 진정성을 보였으니 말이다.

글·사진 김란기 살맛나는 골목세상 대표·정릉 주민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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