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새벽 3시

요즘 아내의 일과는 군대서 시작, 군대로 끝난다

둘째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등록 : 2018-08-09 14:45 수정 : 2018-08-09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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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더운 날 둘째 현역병 입대

아내는 신병교육대 카페에 가입해

군대 이야기라면 눈빛이 반짝

무사히 청춘의 관문을 통과하길

왜 남자들은 중년이 되어서도 군대 얘기만 나오면 침까지 튀겨가며 얘기하려 드는 걸까? 상대방은 전혀 관심 없다는 신호를 보내는데도 입대 영장을 다시 받게 된 악몽 얘기를 또 하려는 것일까?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 내 아내도 그런 여성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옛 직장의 부장님들 군대 얘기는 지금도 거의 외울 정도다.

그러던 아내의 태도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 올해 가장 무더운 날로 기록되던 바로 그날 둘째 아들이 입대했다. 훈련소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 덩치는 성인이지만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 엉거주춤한 청년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고, 엄마들은 조용히 눈가에 손수건을 가져간다. 환송 나온 여자친구들은 웃는지 우는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다. 아빠들은 애써 대담한 척 딴청을 부린다. 뭔가 애국적인 일을 한다는 자부심과 또 어딘가 손해 보는 것 같다는 피해의식이 엇갈리는 순간이다.

아내는 얼마 전까지 이등병이 일등병보다 높다고 착각했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확 바뀌었다. 하루 일과가 군대에서 시작해 군대로 끝난다. 외부와 일체 연락할 수 없는 신병들의 가족을 위해 개설된 ‘신병 교육대 카페’에 가입해 열심히 안부를 올린다. 아들을 자식으로 둔 엄마들을 만나면 화제는 ‘당연히’ 군대 얘기다. 신문을 보던 아내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질 정도로 변했다.


“요즘 이등병 월급이 얼마인지 아세요?”

“글쎄, 한 5만~6만원 받나?”

“세상 변한 것 정말 모르시네. 30만원 정도 받는대요!”

군대 얘기라면 신물이 난다던 그 여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사실 가장으로서 내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것은 지금은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 때문이다. 몇년 전 큰아들이 입대한 뒤 전방의 지뢰 해체 담당 부대로 배치되어 한시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큰아들이 첫 휴가 나오던 날, 기분이 좋아지신 어머니는 며느리와 손자들 앞에서 나에 관한 신화를 한순간에 깨뜨리고 말았다.

“우리 집안에서 할아버지 이후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군인이 나왔구나! 너희 아빠는 가짜 군인인 것 알지? 그때 몸이 안 좋아서 방위 갔는데, 하하하!”

나도 14개월 복무했지만, 하루아침에 ‘가짜군인’으로 지위가 추락했다. 그날 이후 가족들 사이에서 나는 ‘가짜 군인’이란 별명으로 통했다.

최근 또 하나의 별명이 추가되었다. 사연은 둘째 아들 군 입대 며칠 뒤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아내의 휴대전화기로 걸려온 전화에서는 이제 막 입대한 아들의 나라사랑 카드에 잔액이 부족해 얼마간의 금액을 넣어줘야 할 것 같다는 부대의 안내전화였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던가. 뭔가 알지만 어설프게 알아서 그 지식이 오히려 걱정거리가 된다는 뜻이다.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들은 나는 이 전화가 범죄 조직의 ‘보이스 피싱’일 것이라며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병무청과 은행에 확인을 거친 뒤 이는 오해에서 빚은 소동임이 밝혀졌다. 훈련병은 외부와 통화가 금지되어 있기에 부대에서 대신 건 것이고 아들 명의의 군대 계좌에 소액을 넣어달라는 주문이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어쭙잖은 나의 문제의식과 불신감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군복무를 마친 큰아들의 항변이 나를 완전히 코너에 몰았다.

“만약 보이스피싱이라면 병무청과 국방부의 데이터베이스가 털린 것이에요. 그리고 고작 5만원 정도 소액을 본인 명의의 통장에 입금하라는 것인데, 그렇게 간이 작은 보이스피싱이 어디 있겠어요? 그건 공상과학 추리입니다.”

그날 뒤로 내 별명은 ‘가짜 군인’에서 ‘공상과학자’로 바뀌었다. 이전까지 군대에 관한 목소리는 내가 가장 컸다. 나는 두 아들에게 이렇게 힘줘 말하곤 했다.

“돈과 권력, 변칙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군대를 체험하는 게 나쁘지 않아. 남자들에게 입대는 가장 강렬한 체험의 순간이기 때문이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도적인 경험을 하는 곳이잖아. 그때 아니면 인생을 살면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며, 생활하는 시간이 또 언제 있겠어?”

나의 본심은 피할 수 없으면 하루라도 빨리 군대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군대 가기 싫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고생이 곧 의미 있는 시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불만 때문일 거다. 젊은 시절 소중한 땀방울이 어떤 의미인지 확신이 서지 않으니까. 땀방울과 의미의 불일치감에서 오는 아노미 현상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군대란 완전한 성인으로 독립하기 위한 입문 의식이 벌어지는 곳이다.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시련을 만나고, 그림동화의 주인공들이 독일의 깊은 숲속에서 고난을 경험하는 것처럼, 이 땅의 청년들에게는 군대가 기다리고 있다. 인생은 계속되는 관문과 장애물을 넘는 허들게임과 같다. 세상은 마음먹기 달렸다. 의미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훈련소 안으로 들어가던 아들이 잠깐 뒤돌아서더니 이렇게 말한다.

“제가 깜박했어요. 다음에 오실 때에는 식구들 사진 한 장 가져다주시면 좋겠네요.”

아, 역시 나는 가짜 군인이었다. 그 마음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니 말이다. 돌아서 나오는데 훈련소 벽에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바로 내 마음이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손관승 CEO·언론인 출신의 라이프 코치ㅣ저서 『me, 베를린에서 나를 만났다』 등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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