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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 결합 지역화폐 ‘노원’, 일단 안착

암호화폐 기술 첫 적용된 지역화폐 시행 6개월, 회원 4배 가까이 늘어 5600여 명·가맹점 252곳

등록 : 2018-08-0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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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기부를 받아 지역 주민들에게 판매하는 노원역 ‘녹색장터 되살림’에서 공익활동가 정일화(오른쪽)씨가 지난 7월19일 한 노원 주민이 물품을 산 뒤 스마트폰에서 ‘노원 지역화폐 앱’을 열자, 자신도 노원 앱을 꺼내 결제를 돕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모두 수강료를 내주세요. 수강료는 700노원입니다.”

7월26일 오전 11시, 7호선 태릉입구역 근처 노원구 마을공동체지원센터 2층 회의실. ‘지역화폐 노원(NW), 2018 품앗이 데이’ 펼침막 아래에서 열리던 강좌가 끝나자, 지원센터의 최은영 팀장이 20여 명의 수강생들에게 수강료를 말했다.

그러나 ‘커피 드립백 만들기’ ‘프랑스 자수 놓기’ ‘친환경 모기 퇴치제 만들기’ 등 3개의 강좌를 들은 수강생 누구 하나도 지갑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저마다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일종의 전자지갑인 ‘노원 지역화폐 앱’을 열어 강좌를 주관한 ‘마을공동체지원센터 계정’으로 700‘노원’(1노원1원)을 보냈다. 주민들은 이렇게 간단히 노원구 지역화폐로 수강료를 냈다.

앱으로 오간 이 거래를 믿을 수 있을까? 최 팀장과 수강생 모두 거래의 신뢰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2월1일 새로 도입된 지역화폐 노원 앱의 밑바탕에는 암호화폐의 핵심기술인 블록체인 기술이 깔려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역화폐 중 블록체인 기술이 적용된 것은 노원이 세계 최초라고 한다.

노원 이전에는 누구도 지역화폐에 블록체인 기술을 시도하지 않았다. ‘지역화폐’와 ‘블록체인’은 궁합이 안 맞아 보여서였을 것이다.

지역화폐는 1983년 캐나다 밴쿠버섬의 항구도시 커먹스 밸리에서 처음 탄생했다. 지역의 실업률이 높아지자 ‘녹색달러’라는 지역화폐를 만들어 지역주민끼리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게 했다. 지역화폐로 경기 활성화를 꾀한 것이다. 이후 ‘마을공동체’와 ‘생태운동’ 개념이 보태지면서 지역화폐는 차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우리나라에도 외환위기 구제금융 사태 직후인 1998년에 처음 시작된 뒤 전국 곳곳으로 확산됐다.

블록체인은 한동안 열풍이 불었던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의 기반이 되는 기술이다. 블록체인 기술은 암호화폐 거래 내용을 검증에 참여하는 모든 컴퓨터에 ‘블록’으로 저장한다. 블록들은 몇십 초 혹은 몇분 단위로 계속 생성돼 ‘체인’ 형태로 연결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누구도 장부를 조작할 수 없다.


사실 노원구에서는 2016년 9월부터 ‘레츠’(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 방식의 ‘지역화폐 노원’을 쓰고 있었다. “지역화폐 사용은 마을공동체 형성의 완결판”이라는 김성환 전 노원구청장의 철학이 크게 작용했다.

김소라 노원구 마을공동체지원센터장은 “‘지역화폐 거래 체계’로 번역될 수 있는 레츠는 지역 회원끼리 법정화폐 없이 재화와 서비스를 주고받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가령 아이를 봐주는 것은 몇 노원, 반찬을 만들어주는 것은 몇 노원 하는 식으로 회원끼리 서로의 ‘품’ 가격에 합의한 뒤 품을 나누는 형태”(이경희 전 노원지역화폐 운영위원장)였다.

이 방식은 참여자 간 공동체성은 높았지만, 확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참여자 간 신뢰가 낮으면 품 나눔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지역화폐 노원의 회원수는 가장 많았을 때조차 150명 남짓이었다. 노원구는 지역화폐를 확산하기 위해 블록체인에 주목했다. 블록체인은 암호화폐 사례에서 보듯 기술 자체가 신뢰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노원구는 지난해 9월 ‘블록체인을 활용한 노원 지역화폐 추진 계획’을 세우고, 2017년 11월9일에는 ‘노원구 지역화폐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추진 과정에 힘을 실어줬다.

이어 블록체인 기술기업 ‘글로스퍼’(대표 김태원)와 손잡고 지난해 12월31일 블록체인 기반 지역화폐 시스템 구축을 마쳤다. 이후 테스트와 준비 등을 거친 뒤 지난 2월1일 블록체인 지역화폐 노원을 구민들에게 선보인 것이다.


“노원구서 자원봉사하면 시간당 700노원”

물품 기부하면 판매액의 10% 받아

블록체인 도입, ‘노원’ 수수 방법 늘어


최은영 노원구 마을공동체지원센터 팀장(왼쪽 두 번째) 등 노원 주민들이 품앗이 강좌가 끝난 뒤 물품 나눔 코너에서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정용일 기자

출범 6개월을 맞은 지금, 블록체인 지역화폐 노원의 성과는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 2월1일 출범 때 이미 예전 레츠 방식 지역화폐 회원수의 10배인 1526명의 회원이 합류했다. 회원수는 빠르게 늘어나 7월1일 5602명이 되었다. 노원을 쓸 수 있는 가맹점도 2월1일 87곳에서 같은 기간 252곳으로 늘어났다. 7월1일까지 발행된 노원의 총액도 7180만여 노원에 이르렀고, 총 사용액은 3190만여 노원이나 됐다.

이렇게 지역화폐 노원의 회원수와 가맹점 수, 사용액이 크게 늘어난 것은 △노원 획득 범위의 확대 △노원 앱의 편리성 △노원구의 지역화폐 길라잡이 양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먼저 새로운 지역화폐 체계가 출범하면서 새 화폐 노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크게 늘었다. 기존 품 나눔 활동뿐 아니라, 자원봉사, 물품 기부, 금전 기부 등으로도 모두 노원을 얻을 수 있다. 품 나눔을 하거나 자원봉사를 하면 시간당 700노원을 받고, 물품 기부는 기부물품 판매액의 10%를 받는다. 금전 기부도 기부액의 10%를 노원으로 받게 됐다.

또 노원 앱 사용이 카카오페이처럼 간편한 점도 노원 회원과 가맹점에서 노원이 환영받는 한 요인이다. 최은영 팀장은 “서로 앱을 열고 상대방 큐아르(QR)코드를 찍는 간단한 방법으로 지불하기나 선물하기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노원구에서 지역화폐 노원의 활용을 주민들에게 설명하는 ‘지역화폐 길라잡이’를 35명이나 길러낸 것도 노원 회원과 가맹점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노원구 행정지원과 최성수 주무관은 “길라잡이들이 중심이 돼 지난 6월까지 모두 114회나 지역화폐 주민설명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렇게 노원 사용이 늘면서 노원은 점차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든다. 강동원(54·여) 노원구 월계2동 자원봉사 캠프장의 노원 앱에는 들어오고 나간 노원 내용들로 빼곡하다. 강 캠프장은 7월26일 ‘품앗이 데이’ 때 ‘친환경 모기 퇴치제 만들기’ 1시간 실습과 강의를 하고 700노원을 받은 것을 비롯해, 7월4일 봉사활동으로 1400노원을 얻었다. 최근에는 아동용 그림책 기부로 7500노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또 하계동 로열카센터에서 수리비용 가운데 1만원 상당을 노원으로 결제하고, 6월27일 가맹점인 노원향기 카페에서 찻값의 20%인 1540원 상당을 노원으로 결제하는 등 여러 차례 노원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노원이 크게 활성화됐다고 말하기엔 이른 면이 있다. 회원수가 많이 늘기는 했지만, 2017년 12월 말 노원구 전체 인구수 55만4403명을 기준으로 볼 때 아직 1% 수준이다. 음식점 등 대부분의 민간 가맹점은 하루 노원 이용객이 1~3명이다. 그런데다 200여 개가 넘는 가맹점은 지금까지 노원을 받기만 했지, 쓴 경우는 한 번도 없다고 한다. 마땅히 쓸 곳이 없어서다. “커피점인 가맹점에서는 노원으로 주재료인 원두를 살 수 있게 하는 등 가맹점들 간 노원 생태계를 꾸민다”(최성수 주무관)는 애초 목표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셈이다.

그러나 지역화폐 노원 관계자들은 “뚜벅뚜벅 걷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보인다. 최 주무관은 “지금까지 대구시·인천시·남양주시 등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오는 등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 노원에 관심을 가지는 곳이 늘고 있다”고 말한다.

노원역에 있는 ‘녹색장터 되살림’에서 일하는 정일화 공익활동가도 “노원을 지급받는다는 것은 자원순환 등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데 동참했다는 의미를 함께 받는 것”이라며 “노원 가입을 문의하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선화 노원구자원봉사센터 팀장은 “노원으로 통합된 품 활동, 자원봉사 활동, 기부 활동 등이 앞으로는 상호 교류로 더 큰 시너지를 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역화폐 노원을 활성화해 돈 없이도(No원) 살 수 있는 자치구를 만들겠다”는 노원구의 꿈은 그렇게 한 발짝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

김보근 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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