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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첫날만 기분 좋고 무거운 책임감 느껴
수색 역세권 개발 한 단계 발전시켜나갈 것
건너편 상암 지구에 비해 너무 낙후돼
경의선 출발지로 새로운 개발 필수
민주당 컷오프서 탈락-재심 끝 1위
오뚝이 같은 정치적 승리욕 돋보여
‘구청장 될 줄 몰랐지만’ 한길 집중할 터
첫 여성 인사팀장 발탁, 유리천장 깰 것
김미경 은평구청장이 은평구가 최근 진관동 한옥마을 안에 새로 문을 연 ‘삼각산 금암미술관’으로 인터뷰를 하러 들어가다가 잠시 섰다. 김 구청장은 “16년 정치 인생 내내 앞만 보고 달렸으나, 지금부터는 옆도 살피고 뒤도 돌아보며 50만 구민과 함께 가겠다”고 했다. 정용일 기자 youngil@hani.co.kr
서울 25개 구의 민선 7기 구청장들이 새 임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어느 정도 업무 파악이 끝났다고 보고, 인물의 면면과 구정에 임하는 각오를 들어보는 인터뷰를 싣는다. 인터뷰 순서는 크게 초선과 재·삼선 그룹으로 나눠 “참신한” 초선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첫 주자로 은평구 김미경(53) 구청장을 만났다. 인구 50만 명에 재정자립도가 최하위 수준(25개 구 중 23위)인 지역에서, 이번에 새로 뽑힌 13명의 초선 구청장 가운데 가장 높은 66.6%라는 놀라운 득표율(전체로는 2위)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알고보니 당(더불어민주당) 후보 심사에서 컷오프(경선 후보 탈락)되었다가 재심을 요구한 끝에 구제되어 1, 2차 예선과 본선을 모두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불굴의 오뚝이였다. 구의원과 시의원을 거쳐 구청장이 된 정치 역정으로 풀뿌리 정치의 미덕을 보인 점, 시대와 역행하는 관점이긴 하지만 “일과 결혼했다”는 미혼의 여성인 점도 저널리즘의 관심을 받을 만했다. 부드러운 외모와 조곤조곤한 말씨로 “난 저돌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인터뷰 내내 “은평은 아직도 개발에 목마르다”며 수색 역세권 개발, 제2통일로 건설 등 기반 인프라 구축 등 ‘개발 드라이브’가 ‘김미경표 은평’의 중심 화두가 될 것을 예고했다.
취임한 지 한 달이 되어간다. 현장을 많이 다녔나?
“상투적인 말로 들리겠지만, 정말로 당선되고 첫날만 좋았다. 그 뒤부터는 발 한 걸음 내딛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서명 하나 하는 데도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매일매일 현장을 찾아 꼼꼼히 살펴보는데, 내가 이제부터는 50만 은평구민의 생활을 책임지는 행정가라는 사실이 의원 시절과는 확실하게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앞으로 어렵고 힘겨운 일이 많겠지만, 저를 후보 탈락에서 다시 끌어올려준 은평구민, 지난 8년간 함께 일했던 의회, 구청 직원들과 서로 믿고 잘 소통해 무거운 책임을 완수하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
민선 6기까지의 지방행정을 지켜봐왔다. 새 구청장으로서 전임자들과 차별되는 자신만의 콘셉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같은 당의 김우영 전임 청장은 주민참여 행정의 기초를 닦은 분이다. 그분과 전 8년 동안 각각 의회와 행정부에서 손발을 맞춰 도시재생사업과 수색 역세권 개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일 등을 함께했다. 그런 점에서 억지로 과거와 다른 무엇을 찾기보다는 그동안 일해온 기반 위에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이번 임기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지역 개발을 말하는 것 같은데.
“박원순 시장 체제에서 서울은 분명 ‘개발’보다는 ‘재생’에 무게를 두어왔다. 틀린 방향이 아니다. 그러나 재정자립도 23위의 은평, 낙후된 도시기반 시설을 살펴보면 누구라도 이 지역에는 개발이 필요하다고 여길 것이다. 교육, 교통, 생활 시설 등 대부분이 그렇다. 대학도 하나(기독대학교)뿐이고, 변변한 예식장, 호텔 하나 없는 현실이다. 수색 지역은 원래 서부 서울의 중심이었는데 철길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마포 상암지역(디지털미디어센터)과 너무 비교되지 않는가?”
수색이 고향이나 다름없어 특히 수색 발전에 관심을 쏟는다는 말도 있다.
“수색 역세권 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염원이 강하기도 하지만, 남북평화 시대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수색은 신의주평양서울로 이어지는 경의선 출발지로, 새로운 개발이 필수다. 또 수색 개발은 진관 한옥마을, 불광동 혁신파크 등 주변 지역과 연계하며 은평 전체의 발전으로 확산될 수 있다. 남북 공영을 겨냥해 개발된 은평이야말로 장차 한반도 통일을 상상하는 랜드마크가 될 것이다. 정치가로서, 구청장으로서 국토의 균형개발과 지역주민의 요구가 상생하는 그림을 멋지게 그려보고 싶다. 시의회 시절 여성 최초로 도시계획관리위원장을 맡은 것도 이런 콘셉트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가의 지향과 주민들의 욕구가 늘 같을 수는 없다. 은평 주민들이 본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주민들은 생활인이다. 그들의 관심사가 재산권 같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라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관철하기 위해 지역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행정가는 이런 현실을 잘 살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허가 부분에서 민원이 많이 발생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업무 인수인계 매뉴얼(설명서)을 만들어 인수인계 서류만 봐도 업무 흐름을 파악해 신속하게 민원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자고 지시했다.”
여성주의 시대다. 남성 중심의 행정에 어떻게 여성성을 입히는가 하는 것도 하나의 도전이자 숙제라고 여겨진다.
“첫인사에서 인사팀장에 여성을 배치했다. 여성 공무원이 전체의 46.8%를 차지하지만 6급 이상으로 올라가면 비율이 많이 떨어진다. 능력과 관계없는 유리천장은 깨져야 한다. 출산 장려, 일과 가정의 양립 등 국가 정책에 맞는 직장 문화를 은평이 선도할 수 있도록 하겠다. 또 구정 행사나 지역사회 활동도 가정 중심으로 이뤄지는 구조를 많이 만들고 싶다. 예를 들면 일요일 행사를 줄여 휴일을 온전히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을 은평구만의 문화로 자리잡게 하고 싶다. 가족 외식이 늘면 지역 경제에도 보탬이 되지 않겠나.”
주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당선 후 동별로 인사회를 열었다. 많은 분이 청소 문제, 어르신 생활공간 문제 등을 호소했다. 우선 구청장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주민의 역할도 크다. 쓰레기 문제만 해도 버리는 사람,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서는 해결이 어렵다. 주민 편의시설도 주민들이 사용하고 아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아이들 키우는 문제도 전체 부모들이 관심을 가지는 구조가 되었으면 한다. 이런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실 것을 당부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하나 해결점을 찾아가자고 부탁드렸다.”
초선 13명 중 유일한 여성 당선자로서, 컷오프를 극복하고 선거에서 이긴 것은 앞으로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 같다. 정치적 꿈이 있다면?
“정치를 시작해보니까 정치란 자기 하기에 따라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매력적인 분야였다. 그렇게 16년간 정치를 했지만, 솔직히 내가 구청장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 내게 큰일이 맡겨진 만큼 임기 동안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게 맞다. 겨우 초선 아닌가? 내가 지금껏 해보자고 외친 일을 내 손으로 실천하고 마무리 짓다보면 자연스레 더 높고 더 넓은 길도 열리리란 생각까지만 하겠다.”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김미경 구청장은 누구?
김미경 구청장은 누구?
아버지 구의원 선거 도우며 정치 눈떠…도전적 삶
약력
4~5대(2003~2010) 은평구의원, 8~9대(2010~2017) 서울시의원 △문재인 대통령 후보 서울시민캠프 상임대표 △고려대정책대학원(행정학 석사) △53살 미혼. 전남 영암 태생, 은평구 수색 거주 45년 △아버지(김용진), 어머니(최복순)의 3남 1녀 중 1녀.
소개
구의원 두 번과 시의원 두 번을 거쳐 구청장에 선출된 김미경 구청장의 정치 이력은 풀뿌리민주주의 정치의 모범 사례에 속한다. 시의원 낙선 후 구의원 보궐선거 재출마 등 순탄치 않은 역정을 거친 뒤 8~9대 시의회에서 여성의원 최초로 도시계획관리위원장을 맡아 활약했다. 이번 구청장 선거에서는 드라마를 썼다. 민주당 예선에서 컷오프돼 후보 경선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자, 이틀 만에 8천여 명의 탄원 서명을 받아 재심을 요구해 결국 1, 2차 예선에서 모두 승리하며 당 후보가 되었고, 본선에서 초선 최고 득표율(66.6%)로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인터뷰를 통해 본 그의 이미지는 다음 세 가지 일화로 요약될 것 같다. 첫째는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 구의원 선거에 출마한 아버지의 “불공정한” 패배와 선거를 도우면서 “한꺼번에 많은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정치에 매력을 느꼈다는 점이다. 그는 아버지의 경쟁자였던 의원의 사직으로 생긴 보궐선거(2003년)에 나가 당선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보고 그를 찍었겠지만, 그 이후 선거 결과를 보면 “일과 결혼했다”고 공언할 만큼 열성을 보인 그가 점차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치력을 길러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대학에 안 간 사연. “원하는 대학에 가려고 4수를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이한 것은 그가 목표를 낮춰 대학에 가는 대신 사회 진출로 목표를 바꿔버린 것. 세 번째는 서울시의회 도시계획관리위원장 시절의 일화. 도시계획관리위원회는 서울시의 각종 개발 안건을 심의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위원회다. 위원장이 된 그가 처음 한 일은 위원들을 남산으로, ‘청와대 뒷산’으로 데리고 간 것. “전망대에서 전체 서울을 바라보고, 다음에는 산 중턱쯤의 눈높이에서 서울을 조망해보며 개발할 곳과 아닌 곳에 대해 감을 공유하고자 했다.”
사람들에게 종종 까칠하고 비타협적으로 굴어 스스로 “다소 여성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걱정된다”는 자가진단도 해본다고. “그동안은 앞만 보고 가는 것이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옆도 돌아보고 뒤도 살피고 가야 한다는 쪽으로 바뀌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의 명함에 적힌 휴대폰 번호는 그가 직접 받는 번호다. 나를 찾는 전화인데 왜 비서가 받는 걸 쓰냐고 했다는 것이 비서실의 전언이다.
나를 있게 한 이것 오뚝이…불굴의 투지 닮아
나를 있게 한 이것 오뚝이…불굴의 투지 닮아
정치인 김미경이 선택한 이미지는 오뚝이. 오뚝이는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는 불굴의 캐릭터. 젊은 초선 구의원 시절에는 열심히 동네를 누빈다고 해서 ‘발바리’로, 서울시의원 시절에는 주민과 소통을 잘한다고 해서 ‘뚜벅이’로 불렸다는 그가 오뚝이가 된 것은, 이번 선거 과정에서 컷오프 탈락탄원과 재심1, 2차 예선 통과본선 승리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불굴의 투지 덕분이다. 그는 주민들에게서 오뚝이 별명을 선사받고 “평생 좌표가 될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고 한다.
삽화 김경래 기자 kkim@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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