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밭의 경이, “이렇게 게을러도 되는 거야?”

[서울아, 농사짓자] 쿠바에서 시작한 오가노포니코 경작, 마음만 먹으면 옥상도 소중한 텃밭

등록 : 2016-04-28 19:54 수정 : 2016-04-2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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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땅에 버려지는 널빤지와 벽돌로 흙의 유실을 막아 만든 틀밭. 한 가족에게 신선한 먹을거리를 공급할 뿐 아니라 건강한 도시를 만들어가는 디딤돌이 된다.

경기도 의왕 서현농장의 농부들은 게으르다. 가장 힘들다는 밭갈이나 김매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저 밭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은 뒤 가끔 풀이나 잡아 주는 게 고작이다.

보통 농사는 밭갈이로 시작한다. 퇴비를 올린 이랑을 갈아엎고 곱게 흙을 고른 뒤 작물을 심는다. 5평짜리 한 이랑만 해도 삭신이 쑤시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번번이 그런 과정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만 오면 겉흙과 함께 유기물과 무기질이 쓸려나간다. 비도 잘 스미지 않아 한 철만 지나면 밭은 딱딱하게 굳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현농장 농부들이 빈둥댄 건 아니다. 처음 밭을 만들 때 이랑 둘레에 판재로 테두리를 쳤고, 농작물 찌꺼기나 검불 따위 유기물을 보이는 대로 그 위에 덮어 주었다. 그러니 밭속 미생물과 지렁이들이 알아서 밭을 일궜다. 틀밭이다.

 

표토층 보호하면 땅의 생명력도 보존

틀밭 머리에는 이런 내용의 팻말이 있다.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건 표토층입니다. 표토 1㎝ 만들어지는 데 수백년이 걸리지요. 헌데 밭갈이로 고운 흙을 퍼올리면, 비가 올 때마다 유기물, 미네랄과 함께 유실되지요. 흙을 기름지게 하는 미생물이 살 수 없는 땅이 되는 겁니다. 이런 땅에서 작물을 키우려면, 화학비료, 농약, 다량의 축분 퇴비를 써야 하고, 그러면 땅은 더 산성화되고….”

틀밭의 뿌리는 쿠바의 오가노포니코다. 쿠바는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체제 위기에 몰렸다. 1960년대부터 미국과 서방으로부터 경제 봉쇄를 당해오던 터여서 쿠바에게 소련의 지원은 생명줄과도 같았다. 그때까지 쿠바는 드넓은 농장에서 사탕수수와 바나나 같은 상품용 단일작물만 주로 재배했다. 주곡은 수입해 먹었는데, 주곡을 사들일 재원은 바닥났다. 석유 지원이 끊기면서 농기계를 쓸 수 없게 됐고, 비료도 부족해 생산량은 뚝 떨어졌다. 그렇다고 도시민들을 농장으로 강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할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농사를 도시로 끌어와, ‘도시를 경작하기’로 했다. 도시 주변에는 작지만 빈 땅이 많았다. 그곳에 손 경작을 할 수 있을 만큼의 땅에 널빤지나 벽돌 따위로 틀을 만들고 흙을 담아 이랑을 만들었다. 바닥에는 유기물을 듬뿍 넣고, 마을 단위로 생산한 지렁이 분변토도 넣고, 유기물도 넉넉히 얹어 두었다.


겉흙과 유기물, 무기질의 유실이 없어졌고, 잡초도 자라지 않았으며, 미생물들이 밭을 기름지게 했다. 물빠짐이 원활하면서도 틈이 많아 습기도 오래 간직했다. 주 작물 양끝에는 보조 작물을 심어 다양성을 유지했고, 가장자리에는 허브를 심어 방제를 하도록 했다. 밭갈이도, 화학비료도 농약도 필요 없는 오가노포니코는 그렇게 탄생했다. 현재 아바나의 시민 20%는 오가노포니코 경작에 참여한다. 수익은 적지만 먹고살 걱정은 별로 없다. 실업자도 아주 많이 줄었다. 아바나에서 먹는 잎채소의 90%는 오가노포니코에서 나온다. 쿠바의 식량자급률은 95%에 이른다.

서울시도 2010년부터 ‘서울을 경작하기’로 했다. 오가노포니코 개념을 도입해, 아파트 옥상이나 학교에서 텃밭을 가꾼다고 하면 상자텃밭을 제공했다. 하지만 도시 농부라면 굳이 시의 지원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동화나라’는 소문난 도시 농부지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게으른 농부’다. 그의 5평 텃밭엔 틀밭 네 이랑, 닭장, 퇴비간 없는 게 없다. 애초 그곳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다. 지대가 낮은데다 땅은 시멘트처럼 굳어 있어, 비만 오면 물에 잠겼다. 포기할까도 했지만 집에서 10분 거리여서 날마다 먹는 잎채소들을 기르기에 자리가 너무 좋았다.


틀밭 한 귀퉁이에서 자라는 닭. 닭장의 부산물로 만든 퇴비로 기름져진 밭에서 봄을 맞아 새로운 생명이 자란다.

호미 한 자루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밭

2011년이었다. 삽 한 자루로 땅을 파고, 버려진 펄라이트를 두툼하게 깔고 그 위에 돌을 덮고, 다시 그 위에 흙을 깔고 이랑을 만들었다. 버려진 방부목, 화강암 판석, 화장실 타일, 숯 따위로 테두리를 쳐 틀밭을 만들었다. 모퉁이에는 음식물 쓰레기로 퇴비를 숙성시킬 퇴비간도 만들었다. 6개월쯤 지나면서 숙성되기 시작한 퇴비를 틀밭에 넣었다. 두해가 지나자 밭은 손으로 파고 모종을 심어도 될 만큼 부드러워졌다.

이제 호미 한 자루면 씨뿌리기며 모종 옮겨심기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밭이 됐다. 거두는 데 부지런을 떨면 된다. 네 이랑엔 토마토 8그루, 꽈리고추·아삭이고추·청양고추 각 1그루씩, 가지 1그루를 심고, 쌈채 10여종을 한두 포기씩 심었다. 루꼴라와 바질 같은 허브와 미나리·부추·당귀와 블루베리 같은 여러해살이식물도 심었다. 2014년에는 한 귀퉁이에 닭장을 짓고, 집 안에서 기르던 ‘브라우니’와 곡물을 먹기 시작한 병아리들을 함께 넣었다. 지난해 5마리를 분양하고 지금은 암탉 5마리가 자란다. 왕겨를 깐 닭장의 부산물은 퇴비장에 넣고, 퇴비장에서 거둔 각종 애벌레와 지렁이는 닭장에 넣어 주었다. 닭들은 알을 쑥쑥 낳고, 퇴비는 더욱 잘 삭았고, 밭은 기름져졌다.

동화나라의 텃밭은 이제 동네 아이들이 구경하고 꿈꾸는 동화나라 요술 방망이가 되었다.  

글·사진 김이수, 유광숙, 김명희/도시농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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