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기지 내 둔지미 마을을 기억하자

기고ㅣ성장현 용산구청장

등록 : 2017-12-07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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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병오년생(당시 37살) 훈련도감 소속 군인 천흥철은 둔지방 지어둔계 제30통 제1호에 살았다. 조선시대에는 다섯 집을 1통으로 두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했으니 그 당시 지어둔계는 최소 150가구 이상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한 장의 준호구(조선시대 호적). 천흥철의 준호구로부터 둔지산 자락에 살았던 선조들의 흔적들을 되짚어본다. 지어둔계는 둔지미 마을의 전신으로 지금의 용산 미군기지 일대다. 엄밀히 말하면 용산기지는 용산(龍山)이 아닌 둔지산(屯芝山)기지인 셈이다.

둔지산을 중심으로 이태원 마을과 얼음을 보관했던 서빙고, 기와를 굽던 와서까지 선조들의 숨결이 살아 있었다. 일제가 둔지산 일대를 군용지로 강제 수용하면서 우리네 역사 속에서 강제로 지워지기 전까지 말이다. 우리는 일제에게 조상 대대로 이용했던 옛길들을 잃었고, 마을 주민의 젖줄이던 만초천도 ‘욱천’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역대 왕들이 기우제를 지냈던 남단의 역사도 잊혔다.

100여년 긴 세월 금단의 역사를 깨고, 용산기지가 국가공원으로 되돌아온다. 지난 7월 주한미군이 64년 만에 용산시대를 마감한다고 공식 발표함에 따라 가속도가 붙었다.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기지의 온전한 반환’이라는 큰 그림 아래 긴 호흡으로 차근차근 공원을 만들자는 사회적 분위기도 형성됐다.

용산공원에 대한 용산구의 기대 또한 크다. 중앙정부가 놓치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 용산구가 세밀하게 채워나갈 것이다. 이미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역사에 관심을 두고 사료를 수집하는 것도 이런 노력의 하나라 하겠다.

올해 달력을 한장만 남겨둔 지금 또 하나의 결실을 맺었다.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를 발간한 것이다. 2014년 첫선을 보인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에 이은 두번째 역사 기록물이다.

이번에는 일제의 용산 군기지 조성과 확장 과정은 물론 미시사적 분석을 통해 군사기지 이전 천흥철과 같은 선조들의 일상까지 기록했다. 둔지산과 만초천 등 용산기지의 생태환경도 자세히 설명해 이 땅이 지닌 역사적·장소적 가치를 한층 높였다.


용산구 주한미군기지. 용산구 제공

책의 가장 큰 성과는 단연 ‘한국 용산 군용 수용지 명세도’ 발굴에 있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 연구실장이 찾아낸 명세도에는 둔지미 마을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가 상세히 표시돼 있다. 1906년 일제가 용산 군용지를 수용하면서 조사한 가옥, 묘지, 전답 등의 기록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300만 평에 이르는 용산 군용지 면적이다. 지금의 공원 조성 터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데, 그 당시 선조들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군사기지로만 인식되던 지역 역사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바라건대 기지의 온전한 반환도 좋지만, 일제에게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둔지미 마을 주민들의 아픔도 함께 기억하면 좋겠다. 공원에 선조들의 애환을 달래는 작은 추모 공간이라도 마련되길 바란다.

최초로 조성되는 국가공원인 만큼 어떻게 공원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각계각층의 수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가 새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하며, 아울러 국무총리실 산하 국토교통부는 물론 환경부, 국방부, 서울시, 용산구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용산국가공원 추진위원회’ 조성을 제안한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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