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걷자 인생 2막이 열렸다

[이인우의 서울&] 안정된 직업 박차고 여행가로 살아가는 박재희씨

등록 : 2016-04-21 16:33 수정 : 2016-04-25 10:19

크게 작게

뉴질랜드 밀퍼드 사운드 트레킹 여정을 담은 '숲에서 다시 시작하다'의 저자 박재희씨는 지금 에스파냐 산티아고 순례길 800㎞에 도전하고 있다. 사진은 7일째인 지난 7일 아조프라에서. 박재희 제공

한때 아이티 업계에서 ‘글로벌 마케터’로 잘나가던 박재희(51)씨. 외국 유학을 다녀와 대기업 회장 비서실을 거쳐 델컴퓨터, 한국 이엠시(EMC)를 비롯, 액티피오(Actifio) 아시아태평양 마케팅 총괄 등 27년 동안 화려한 커리어를 쌓았다. 성공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도 예외 없이 퇴직의 수순을 밟고 있음을 발견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4050 직장여성들은 인생 후반을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직장과 가족에 매인 생활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 본 적이 없는데…. 과연 내게도 선택 가능한 삶이 있을 수 있을까?’ 자기를 향한 질문은 꼬리를 물었고, 대안 없는 질문들이 무력감과 피로감을 몰고 다닐 때였다.

“그때 비슷한 고민 속에 ‘리셋 마이 라이프(Reset my life)!’를 외치던 다양한 연령대의 친구들과 함께 의기투합했다. 떠나 보자고.”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이라는 뉴질랜드의 세계자연유산인 ‘밀퍼드 사운드’로 트레킹을 떠난 것이 전환점이 되었다. 여행가가 되어 보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이 ‘목숨 걸고 딴짓한다’고 할 정도로 이것저것 열정적으로 간섭하고 몰아치길 좋아하는 제 성격과 잘 맞을 것 같았다.”

말그대로 인생을 ‘재설정(리셋)하고 싶은 7명으로 구성된 리셋원정대의 밀퍼드 트레킹 여정이 아름다운 사진들과 함께 펼쳐진 여행기가 <숲에서 다시 시작하다>(꿈의 지도 펴냄)이다.

“밀퍼드 길을 걷는 동안 평생 본 것보다 많은 무지개를 봤다. 그 일곱 색깔은 저마다 또렷하면서 함께 아름다웠다. 인생이란 자기 나이에 맞는 빛깔을 내고 그것들이 모여서 인생 전체의 빛깔을 만드는 거라는 생각을 해 봤다.”

화려한 경력에 이어 인생 후반부를 이끌 새로운 무대까지 찾은 그녀에게 지나온 직장생활에 대해 물었다.

“실력보다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예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윗사람 복이 있었고, 능력 있고 나보다 뛰어난 직원을 팀원으로 두는 행운이 이어졌다. 굳이 성공적인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 후배들, 부하 직원들 덕분이었을 거다. 사람을 잘 만난 게 성공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7년간 업으로 삼은 세계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를 꼽으라면?

“열정이 사라진 게 가장 크겠죠? 어느 날 보니까 내가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있었다. 재미있던 일이 언젠가부터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다. 파국이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 늦기 전에 세상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고 싶었다. 그 무렵 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영향을 미쳤다. 죽음을 생각하니 의외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여행가가 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여행의 본질은 멀리, 많이 다니는 게 아니라 일상과의 거리두기라고 생각한다. 난 늘 창의적 문제 해결, 자유롭고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져 왔다. 그 방법으로 여행만큼 좋은 게 없었다. 여행을 통해 걸러진 생각들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의미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체력만 빼면 지금 나이대가 경험, 통찰, 이해 모든 측면에서 젊은 시절보다 낫다고 자부한다(웃음).”

박씨는 지금 에스파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다. <숲에서 다시 시작하다>가 출판되기 무섭게 다시 ‘단독 군장’을 쌌다. 오랫동안 꿈꾸웠던 순례자의 길을 오롯이 혼자 걸어 보고 싶었다.

지금 걷는 곳은 당신에게 어떤 곳일까?

“막연히 십년 전쯤부터 나이 쉰이 되면 꼭 걸어 보리라 생각했다. 800㎞를 혼자 걷는 것만큼 치열하게 인생을 돌아보는 방식은 없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주로 하며 걷는가?

“거창한 생각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걷는 동안 하는 생각은 얼마나 더 가야 화장실이 있고, 물병에 물을 채울 수 있을까? 오늘 밤 어디서 잘까? 알베르게(숙소)는 잡을 수 있을까? 이렇게 지치는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등등 하루하루 가장 중요한 게 생리적인 문제들이다. 허무하지만 이건 진짜다.”

밀퍼드 트래킹과 산티아고 걷기를 인생에 비교한다면?

“밀퍼드는 초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힐링과 리셋을 하는 걷기라면, 산티아고 길은 인생 그 자체 같다. 꼭 종교적인 고행이 아니라 해도 평균 5~6주가 걸리는 일정은 결코 쉽지 않다. 무작정 그 시간을 걸으라고 한다면 다들 질색하지 않을까? 인생은 싫다고 살기를 그만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인생을 닮았다고 말할 수밖에.”

돌아오면 무엇을 하고 싶어질까?

“산티아고 길이 다 끝나고 날 때쯤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하지만 책을 내고 그냥 떠났기 때문에, 일단 책을 만들어 주고 아껴 준 분들과 만나는 자리를 먼저 갖겠다. 책 이야기, 산티아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 목표를 생각하며 걷는다.”

요즘 가장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가 있다면?

“멋진 노인이 되기! 나의 진정한 야망이다. 어떻게 하면 남은 생애 30년을 남과 내가 도움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진짜 내가 하고픈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며 늙어 갈까이다.”

어쩌면 당신의 인생은 젊은 여성들의 로망일 수도 있다. 도움이 될 만한 말이 있다면?

“그런 거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젊은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꼰대되는 첫걸음 같아서 싫다. 그 나이에는 절대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일을 조언이라고 한다면 아마 나라도 화가 날 것 같다.”

인터뷰는 박씨가 3월27일 에스파냐로 출국하기 전에 한번 했고, 나머지는 카카오톡을 이용해 해 보기로 했다. 산티아고 노정에서 박씨는 기자와 몇 차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문자와 사진이 실시간으로 전송되면서 원거리 인터뷰임에도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다. 세계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할 일도, 꿈꿀 시간도 더욱 많아지고 있다. 여성들이여! 변화를 원한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인생 후반, 잃을 것은 갱년기뿐이다.

<서울&> 콘텐츠디렉터 iwlee21@hani.co.kr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