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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에 있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게티이미지뱅크
친일파 글씨가 독립운동가 작품으로
버젓이 전시된 낯부끄러은 해프닝
비운의 흥화문 제자리 언제 되찾을까
하나의 족자가 문화계를 들끓게 하고 있다. 문제의 글씨는 독립지사 박원근 선생 작품으로 둔갑해 그의 유족까지 친전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글씨의 주인공은 바로 악질 친일파 박중양의 것으로 판명됐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소장자가 바로 국립중앙 박물관장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박중양은 일본 유학 때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 이름을 지었고 창씨개명 강요 이전에도 자식들에게도 일본 이름을 지어줬다. 엉뚱하게 족자에 쓰인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독립지사 박원근 선생으로 박물관이 착각하면서 빚어진 해프닝이다. 해프닝이라 치부하기에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나아가 최악질 친일 매국노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만들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런 기구하고 분노할 유물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흥화문(興化門)이다. 조선 시대 궁궐의 남문(정문)은 ‘化’로 끝나는 공통점이 있다. 광화문(光化門, 경복궁), 돈화문(敦 化門, 창덕궁), 홍화문(弘化門, 창경궁 동문), 흥화문(경희궁), 인화문(仁化門, 덕수궁)이 그것이다. 인화문은 1907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꿨고 정문도 동문으로 이전하면서 대안문(大安門)으로 고쳤다가 나중에 다시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했다. 이름에 ‘化’를 붙인 것은 백성을 교화(敎 化)하고 감화(感化)시킨다는 뜻과 의도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이 다 불타버린 뒤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했으며 경희궁을 새로 지었고 경운궁도 비상시 왕이 머무는 이궁(離宮)으로 승격시켰다.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한 것은 파손된 기존 궁궐을 복구한 것이니 재정적으로 힘들었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왕권의 회복과 과시라는 점에 집착해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한꺼번에 새로 지은 것은 과했다. 경희궁 자리는 본래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저택이었는데 왕기가 흐른다는 핑계로 몰수한 뒤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는데 ‘경덕’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은 우 리가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오랫동안 이궁 역할을 수행했는데 영조는 오랫동안 경희궁에서 지냈고 정조가 이곳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일부 전각이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는데 고종이 즉위한 이후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전각을 헐어 쓰면서 궁으로서의 면모를 크게 잃었다.
그러다 1910년 일제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 전신)를 세우기 위해 남은 전각 대부분을 헐었다. 정전(正殿)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에 매각돼 법당으로 바뀌었고 광복 후 그 조계사 터에 동국대학교가 건립되면서 지금의 정각원으로 쓰고 있다. 고작 학교 하나를 세우기 위 해 일부러 조선 왕실의 궁을 완전히 소멸시킨 것이다. 그것은 매우 악질적 의도의 야만 이었다. 본디 경희궁 동쪽에 배치됐던 흥화문은 2층으로 된 다른 궁궐 정문과 달리 1층으로 지어졌는데 건립 당시 중층으로 세우려 했으나 일시적으로 화재나 역병 등을 피할 피우처(避寓處)로 삼았기 때문에 작게 지었다고 한다. 아마 재정 문제와 백성의 원망 어린 눈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는 이 문을 떼어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이전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寺)로 옮겨 사찰 문으로 사용했다. 절 이름에서 그대 로 알 수 있듯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일제는 흥화문의 이름도 바꿔 경춘문(景春門)으로 개명했는 데 이토 히로부미의 호인 ‘춘무’(春畝)를 경사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조선 왕실의 정문이 식민지 침략자의 영혼을 지키는 문지기로 전락한 역사적 대굴욕의 순간이었다. 자리 또한 고약했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는 장충단(奬忠壇)이 있던 곳으로 장충단은 명성 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사망한 홍계훈, 이경직 등을 모셨으며 정기적으로 제향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그곳을 허물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을 세운 것 자체가 우리로 서는 모욕적이다. 흥화문이 그 절의 대문으로 쓰였다는 건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크다. 훗날 그곳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정문으로 사용했으며 다시 신라호텔로 바뀐 뒤에도 여전히 사용했다가 1988년 경희궁 자리에 돌려주고 지금은 복제해 쓰고 있다. 그렇게 경희궁과 흥화문의 운명은 식민지 조선의 처지를 그대로 담아 처참하고 절절했으나 끝내 제자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예전 서울고등학교 정문 자리로 옮겨놓았다. 가끔 새문안거리에 있는 시네큐브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경희궁 산책을 즐길 때마다 흥화문의 기구한 운명을 되새겨본다. 언제 제자리를 찾을 것이며 어떻게 우리의 기상을 회복할지를 가늠해본다. 그런데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그것도 관장이 소유한 족자를, 관장의 추천으로 특별전에 내세웠다가 진실이 드러나며 그 추한 모습이 겹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는 흥화문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어렵겠구나 싶어 안타깝다. 친일매국행위를 단죄하고 청산하지 못한 업보가 참으로 질기고 오래간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무지와 방관이 빚어낸 자업 자득일 것이다. 거짓과 왜곡이 진실인 양 버젓하게 행세하다 한 세대가 지나면 그대로 굳어지기 쉬운 게 세태라는 점에서 당대인들이 밝고 푸른 눈을 치켜떠야 겨우 역사를 제자리에 간직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김경집(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버젓이 전시된 낯부끄러은 해프닝
비운의 흥화문 제자리 언제 되찾을까
하나의 족자가 문화계를 들끓게 하고 있다. 문제의 글씨는 독립지사 박원근 선생 작품으로 둔갑해 그의 유족까지 친전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글씨의 주인공은 바로 악질 친일파 박중양의 것으로 판명됐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소장자가 바로 국립중앙 박물관장 자신이라는 점이었다. 박중양은 일본 유학 때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는 당시 자발적으로 일본 이름을 지었고 창씨개명 강요 이전에도 자식들에게도 일본 이름을 지어줬다. 엉뚱하게 족자에 쓰인 박원근이라는 이름을 독립지사 박원근 선생으로 박물관이 착각하면서 빚어진 해프닝이다. 해프닝이라 치부하기에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나아가 최악질 친일 매국노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만들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런 기구하고 분노할 유물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흥화문(興化門)이다. 조선 시대 궁궐의 남문(정문)은 ‘化’로 끝나는 공통점이 있다. 광화문(光化門, 경복궁), 돈화문(敦 化門, 창덕궁), 홍화문(弘化門, 창경궁 동문), 흥화문(경희궁), 인화문(仁化門, 덕수궁)이 그것이다. 인화문은 1907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꿨고 정문도 동문으로 이전하면서 대안문(大安門)으로 고쳤다가 나중에 다시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했다. 이름에 ‘化’를 붙인 것은 백성을 교화(敎 化)하고 감화(感化)시킨다는 뜻과 의도였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이 다 불타버린 뒤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했으며 경희궁을 새로 지었고 경운궁도 비상시 왕이 머무는 이궁(離宮)으로 승격시켰다.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한 것은 파손된 기존 궁궐을 복구한 것이니 재정적으로 힘들었지만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왕권의 회복과 과시라는 점에 집착해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한꺼번에 새로 지은 것은 과했다. 경희궁 자리는 본래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저택이었는데 왕기가 흐른다는 핑계로 몰수한 뒤 경덕궁(慶德宮)을 지었는데 ‘경덕’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발음이 같아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은 우 리가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오랫동안 이궁 역할을 수행했는데 영조는 오랫동안 경희궁에서 지냈고 정조가 이곳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일부 전각이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는데 고종이 즉위한 이후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한 자재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전각을 헐어 쓰면서 궁으로서의 면모를 크게 잃었다.
그러다 1910년 일제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경성중학교(서울고등학교 전신)를 세우기 위해 남은 전각 대부분을 헐었다. 정전(正殿)인 숭정전은 1926년 일본 사찰 대화정 조계사(大和町 曹溪寺)에 매각돼 법당으로 바뀌었고 광복 후 그 조계사 터에 동국대학교가 건립되면서 지금의 정각원으로 쓰고 있다. 고작 학교 하나를 세우기 위 해 일부러 조선 왕실의 궁을 완전히 소멸시킨 것이다. 그것은 매우 악질적 의도의 야만 이었다. 본디 경희궁 동쪽에 배치됐던 흥화문은 2층으로 된 다른 궁궐 정문과 달리 1층으로 지어졌는데 건립 당시 중층으로 세우려 했으나 일시적으로 화재나 역병 등을 피할 피우처(避寓處)로 삼았기 때문에 작게 지었다고 한다. 아마 재정 문제와 백성의 원망 어린 눈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는 이 문을 떼어 1915년 남쪽 담장으로 이전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寺)로 옮겨 사찰 문으로 사용했다. 절 이름에서 그대 로 알 수 있듯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일제는 흥화문의 이름도 바꿔 경춘문(景春門)으로 개명했는 데 이토 히로부미의 호인 ‘춘무’(春畝)를 경사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조선 왕실의 정문이 식민지 침략자의 영혼을 지키는 문지기로 전락한 역사적 대굴욕의 순간이었다. 자리 또한 고약했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는 장충단(奬忠壇)이 있던 곳으로 장충단은 명성 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때 사망한 홍계훈, 이경직 등을 모셨으며 정기적으로 제향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그곳을 허물고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절을 세운 것 자체가 우리로 서는 모욕적이다. 흥화문이 그 절의 대문으로 쓰였다는 건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크다. 훗날 그곳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정문으로 사용했으며 다시 신라호텔로 바뀐 뒤에도 여전히 사용했다가 1988년 경희궁 자리에 돌려주고 지금은 복제해 쓰고 있다. 그렇게 경희궁과 흥화문의 운명은 식민지 조선의 처지를 그대로 담아 처참하고 절절했으나 끝내 제자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예전 서울고등학교 정문 자리로 옮겨놓았다. 가끔 새문안거리에 있는 시네큐브에 영화를 보러 갔다가 경희궁 산책을 즐길 때마다 흥화문의 기구한 운명을 되새겨본다. 언제 제자리를 찾을 것이며 어떻게 우리의 기상을 회복할지를 가늠해본다. 그런데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그것도 관장이 소유한 족자를, 관장의 추천으로 특별전에 내세웠다가 진실이 드러나며 그 추한 모습이 겹치면서 여전히 우리에게는 흥화문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어렵겠구나 싶어 안타깝다. 친일매국행위를 단죄하고 청산하지 못한 업보가 참으로 질기고 오래간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무지와 방관이 빚어낸 자업 자득일 것이다. 거짓과 왜곡이 진실인 양 버젓하게 행세하다 한 세대가 지나면 그대로 굳어지기 쉬운 게 세태라는 점에서 당대인들이 밝고 푸른 눈을 치켜떠야 겨우 역사를 제자리에 간직할 수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김경집(인문학자, 전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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