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공유
Life23. O.K.A.Y, mixed media on paper, 53×77㎝
1박은 아니었으리라. 그래, 전국에서 모이는 회사 시무식 여행인데, 설마하니 두 밤은 잤겠지. 사내 행사용 여행은 대부분 기억이 흐릿한데 유독 ‘골든벨’ 게임만은 생생하다. 내가 나를 안다. 자진해서 무대에 올랐을 리가 없는데, 어찌된 걸까? 기억 속의 나는 동료 몇과 함께 스케치북을 앞에 두고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 있다. 돼지 저금통을 처음 만든 나라에 대한 답을 적자마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이댔다. 왜 영국이라고 적었느냐고요? 어릴 적 좋아했던 이니드 블라이튼의 동화책에 돼지 저금통이 등장했는데, 배경이 영국이거든요. 똑 부러진 정답을 내놓은 탓에 찬사를 받으며 우쭐하면서도 무안했는데, 그 끝에 어린 시절 이라크에서 읽었던 책들의 근황이 문득 궁금해졌다.
집에 돌아와 그 작가의 책을 검색하다 깜짝 놀랐다. 작가의 사생활 문제는 물론, 이야기에 드러난 차별적인 시선과 대사까지 논란이 무성했다는 거다. 그 결과 뛰어난 상상력으로 빚어낸 신기한 나라와 모험의 줄기는 두고 요즘 통념에 맞게 수정하거나 재창작하여 출간되고 있단다.
내 보물 상자를 꺼내 낡은 책을 찾아냈다. 잊힌 채 몇십 년의 시간을 끌어안은 책은 누렇다 못해 바스러질 듯했다. 찢어진 모퉁이를 이어 붙인 테이프도 의리를 지키느라 못지않게 누 긴가민가 싶은 기억이 떠올랐다. 이거, 어렸을 때 내가 붙인 거야! 책을 다시 읽으니 문제가 되었을 부분이 한눈에 보였다. 고루한 성역할, 인종차별적 묘사 등 마음 불편한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이걸 어떻게 수정했을까, 궁금한 마음이 복잡했다.
최근에 비비안 리와 클라크 게이블 주연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이 일이 다시 생각났다. 기술이 바뀔 때마다 사서 소장해 온 영화라 온라인 플랫폼에서도 구입했는데, 몇 년 전 보려고 찾으니 메뉴에서 사라진 게 아닌가. 그 당시 영화와 소설이 노예제를 미화하며 인종차별적 시선을 담고 있다고 큰 비판을 받았는데, 그 여파로 내렸나보다 짐작했다. 소설책도 이사하며 없어졌는데 영화는 이렇게 못 보게 되는 건가 싶어 속을 태웠다.
나의 첫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책은 세계 명작전집의 일부였다. 카키색 표지에 내 손만 한, 작고 두꺼운 990원짜리 책이었다. 직독 직해에 가까운 번역본이었는데, 훗날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뒤져도 찾지 못했다. 고등학생 때 읽고는 남부 사회의 양면성과 문명의 몰락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선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데미안』 속 문구처럼 품었던 듯하다. 한참 뒤에 『카네기 인생론』을 읽으면서도 이 책을 떠올렸는데, 벨(Belle)이라 불린 남부 처자들이 교육받았다던 처세술과 카네기가 제시하는 지혜가 어쩐지 닮아 있어 달밤에 혼자 큭큭 웃었다.
설마 영영 사라졌을까 싶어 며칠 전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다시 올라와 있었다. 덥석 틀었는데, 비디오 시절,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불법 복제 경고 같은 고지문이 나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종 차별은 미국의 불행한 역사를 반영하며, 그건 그때도 지금도 잘못된 일이며, 그걸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마치 뮤지컬이나 클래식 공연처럼 중간에 ‘Intermission’이라는 자막과 함께 쉬는 시간이 주어진 것도 삭제하지 않았다. 영화가 제작된 시대의 관람 문화가 지금과 달랐음을, 그 시대적 맥락을 인지하게 한 장치였지 싶다. 불현듯 과거를 담아낸 과거의 시선과 ‘또한 과거가 될’ 지금의 시선이 마치 끊이지 않는 거울 속 거울 속 거울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무한 거울 앞에 서서 마주해본다. 문제 많은 내 유년의 책들, 나의 스칼렛과 레트, 그리고 그걸 보는 나….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서울& 인기기사
-
1.
-
2.
-
3.
-
4.
-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