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일상이 흐르는 물길

서울, 이곳 l 은평구 불광천

등록 : 2026-09-24 01:59 수정 : 2026-09-24 10:48

크게 작게

냇가에 앉아 있는 여인들의 뒷모습. 냇가를 따라 조르르 앉은 여인들의 손에는 젖은 빨래가 들려 있다. 평생 분칠이라곤 해본 적 없어 뵈는 거무튀튀한 얼굴,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거칠고 투박할 게 틀림없는 손등.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 속 여인들의 모습이다.

나는 그림 속 여인들을 보며 자식들 거둬 먹이느라 고생하고 사신 어머니의 일평생이 떠올랐다. 인생이 고달팠지만 원망하지 않으셨고, 가지 많은 나무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어지간한 일에는 요동치 않는 단단함과 묵직함이 있으셨던 그 시절 우리 의 어머니들. 사람들이 박수근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힘겨운 삶을 꿋꿋이 버텨내신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이 그림 속 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천에서 빨래하던 모습은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옛일이다. 물길은 정비됐고 빨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온 마을 여인들이 빨래터에 앉아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 소식을 주고받던 장소의 기능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냇가를 걸어 집으로 가고, 냇가를 지나 시장으로 간다. 냇가에서 이웃을 만나고, 냇가를 거닐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박수근이 묘사한 냇가는 어느 한 곳을 특정한 그림이 아니겠지만, 동네 어귀를 졸졸 흐르는 불광천, 안양천, 홍제천 같은 그런 천변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체 길이가 9.2Km에 이르는 불광천은 응암역 부근에서 모습을 드러내 새절역과 증산역을 지나 월드컵 경기 장 부근에서 홍제천과 만난다.

서울의 자랑은 누가 뭐래도 한강이다. 도시 한복판을 흐르는 이렇게 큰 강이 있는 수도는 세계 어디를 봐도 무척이나 귀하다. 그뿐인가. 한강에서 뻗어 나와 서울의 온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들며 이 땅을 촉촉하고 풍요롭게 적셔주는 한강의 지류들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축복인가. 이제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한강의 지류들은 서울을 대표하는 산책로가 되어 때로는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찾기까지 한다. 청계천이 그렇고 양재천이 그렇다.

은평구 주민들의 평범한 일상 배경이 되어주는 불광천.

그에 비하면 불광천은 참으로 소박하다. 일부러 찾아가는 관광지는 아니지만, 은평구 주민들에게는 사랑방이라 불러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이곳에 가느라 멋내는 이는 없다. 시간을 정해 일부러 외출하는 곳도 아니다. 지하철역에 내려 집으로 가는 길목이며, 장을 보러 가다 이웃을 만나 인사하는 길목이다. 생활 속 한 귀퉁이 늘 곁에 있으며 계절이 바뀌었음을 슬쩍슬쩍 알려주는 동네의 물길이며, 누군가의 평범한 하루가 이곳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불광천이 늘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었던 건 아니다. 1970~1980년대 응암동에 살았던 이들은 불광천 악취를 기억한다. 하천을 덮어 도로를 만든 게 화근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물이 거의 말랐고, 물이 없어진 하천에는 쓰레기가 쌓였다. 오수와 악취는 비단 불광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구가 늘고 도시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서울의 하천은 극심한 오염으로 몸살을 앓았다.


불광천이 지금의 모습을 찾은 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대대적인 하천 정비를 시작하면서다. 직선화했던 물길에 다시 굴곡을 만들었고, 지하수를 끌어올려 유량을 늘렸다. 깨끗해진 하천엔 식물이 살아 났고 물고기와 새가 다시 돌아왔다. 동물이 살 수 있는 곳에 사람도 살 수 있다. 공원이 된 하천은 이제 지역을 대표하는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됐다. 응암역에서 새절역, 증산역을 지나 월드컵경기장까지 길게 이어지는 천변엔 사시사철 번갈아 꽃이 피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심지어 동네 강아지들도 이 곳 불광천을 만끽한다.

명절을 앞둔 대림골목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친다.

불광천 산책을 마치고 나는 발길을 돌려 대림골목시장으로 향했다. 시장 앞 감잣국 거리가 목적지다. 이름만 감잣국이지 우리가 흔히 아는 그 감자탕을 이곳에선 감잣국 이라 부른다. 한창 번성했을 때는 이 거리에 열대여섯 개나 되는 감잣국집이 즐비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달랑 네 개만 남았다. 그 많던 감잣국집이 하나둘 다른 메뉴로 업종 을 변경하고 있다. 음식도 유행이 있다지만 이렇게 오래된 가게들은 없어지지 않고 남았으면 좋겠다. 특별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은평구 주민들이 가장 편하게 오가는 불광천 물길처럼, 이곳 감잣국 거리도 오래도록 우리들의 빈속을 든든히 채워주었으면 좋겠다.

뼈다귀를 듬뿍 넣어 끓인 감잣국. 이 지역에서는 감자탕이라 부르지 않고 감잣국이라 부른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