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숨’ Jaye 지영 윤

등록 : 2025-12-25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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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04.Grace, Mixed Media on Paper, 53.5x76.5cm

매년 12월이 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이라크에서 살던 어린 시절,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의 친구였던 ‘루디 아줌마’다. 파독 간호사로 독일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입양한 아들 루디와 예의 바른 누룽지색 대형견을 키웠는데 그분은 웃음 가득 이야기보따리였다. 얇고 긴 독일 소시지, 부들부들한 와플에 티라미수며 미트 스튜를 만들어 여기저기 나눴고, 온 동네 아이들의 수영 강사를 자청해 자유영·배영 다 건너뛰고 평영만 가르치는가 하면, 다이아몬드 게임을 전수해 놓곤 어린 내가 ‘알박기’로 승리 선언을 방해하자 성을 내며 방을 뛰쳐나갔던 ‘어른’이었다. 두 번 다시 나랑 놀면 사람이 아니라던가….

어느 날인가는 자기 집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몇몇 한인 가족을 초대했다. 커다란 트리는 물론 장식용 양말같이 여기저기 놓인 크리스마스 소품으로 장식된 집은 모두 처음이었지 싶다. 다른 때면 신나게 숨바꼭질, 말타기, 술래잡기를 했을 개구쟁이들도 이날만큼은 집 안을 가득 채운 고소한 냄새에 놀이는 뒷전, 언제 밥 먹으라고 부르나 기웃기웃 들락거렸다. 그때, 거실에서 루디 아줌마가 불렀다.

우리를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앞으로 데려가더니 작은 막대기를 나눠주곤 차례로 불을 붙였다. 요즘은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스파클러였는데, 차르르 타들어가며 화려한 불꽃을 뿌렸다. 예쁘다 못해 황홀했던 그 경험!

지금이야 오죽 가난했으면 파독 간호사가 됐을까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루디 아줌마는 그늘 한 점 없었다. ‘환대’로 가득한 마음 밭만 대평원 같던 이였다. 피붙이도 그렇게 베풀지 못할 텐데 사람을 좋아하는 성정을 타고난데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마저 겹쳐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사랑을 퍼부었다. 전해 듣기에, 안타깝게도 아줌마의 말년이 외롭고 힘들었다니 여기저기 마음 준 만큼의 ‘화답’은 받지 못했던 성싶다. ‘환대’와 ‘화답’은 분명 한 세트인 듯한데 크기를 맞춰 주고받아지는 게 아니구나, 나라도 좀 더 잘할걸, 후회하며 마음 저렸다.

얼마 전 신촌에서 만난 지인들과 크리스마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어떤 이에게는 그저 하루 쉬는 ‘빨간 날’이고, 누군가에겐 일 년에 몇 번 있는 교회 가는 날이란다. 나는 루디 아줌마와의 풍성한 추억과 함께 환대와 화답의 불균형에 대해 골똘해졌다. 그 끝에 문득 크리스마스 역시 그런 날이 아닌가 생각이 스쳤다. 모두를 사랑으로 환대한 마음이 태어난 날 말이다. 오늘 태어났다는 그는 막무가내로 따라온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기도 했고, 손가락질당하던 이에게는 함께 밥 먹자 초대하는가 하면, 모두가 피하는 이는 찾아가 치유하고 관계를 회복시켰고, 함께 걷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동행하는 환대도 보였단다. 그는 화답에는 기뻐했지만, 기다릴 뿐 강요하지 않았다.

그에 대응하여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어떤 날인가 생각하니 불현듯 화답하는 날이면 어떨까 싶었다. 내가 삶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모든 환대에 화답하는 날 말이다. 물론 화답하려면 받은 환대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할 테니 그것부터 생각해볼 일이다.


그건 들숨을 채우는 공기, 수묵화처럼 펼쳐진 너그러운 산등성이, 봄 온 줄 아는 용케 쏘옥 새싹, 소복이 쌓인 알록달록 낙엽, 별 내리듯 나리는 함박눈. 혹은 무거운 문을 잡아준 청년, 엎지른 물 치워준 점원의 웃음, 당신 자리 내주신 마음.

그런가 하면 축하와 함께 꽃다발 준 손, 아픈 자리에 찾아온 위로, 함께해준 곁. 값없이 넙죽 받은 끝도 없는 환대에 나의 턱없이 모자란 화답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이걸 어쩌나, 한다. 아마도 오늘은 내게, 그러라는 날….

글·그림 Jaye 지영 윤(‘나의 별로 가는 길’ 작가·화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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