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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학습자용 책 “일반인과의 소통 도구”

서울도서관에 발달장애인용 책 제작해 기증한 함의영 피치마켓 대표

등록 : 2017-07-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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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의영 피치마켓 대표가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피치마켓 사무실에서 발달장애인용 책을 들고, 서울도서관과 함께 만든 발달장애인용 서가인 ‘복숭아 서가’의 뜻을 설명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옛 서울시청사를 리모델링해 변신한 서울도서관 1층에 가면 ‘복숭아 서가’라는 이름의 특별한 서가를 만나게 된다. 아직 책은 많지 않다.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오 헨리의 <오 헨리 이야기>,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 알퐁스 도데의 <어머니>, 유몽인의 <어우야담>, 그리고 윤영주 전 크라운베이커리 회장 이야기를 다룬 <우드앤브릭> 6권이 전부다.

아직은 빈약해 보이는 이 서가가 특별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발달장애인을 위한 서가’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꽂혀 있는 책들이 특별하다. 하나같이 큼지막한 활자에, 그림도 밝고 단순하다. 책들 역시 우리나라 최초로 발달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도서로, 엔지오 ‘피치마켓’에서 펴낸 것들이다.

복숭아 서가는 지난 6월19일 서울도서관(관장 이정수)과 피치마켓(대표 함의영)의 협약으로 태어났다. 서가는 아직 작지만 서가가 상징하는 ‘정보 불평등 극복’을 위한 메시지는 결코 작지 않다. 지난 17일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에 있는 피치마켓 본사에서 함의영(36) 대표를 만나 낯설지만 반가운 복숭아 서가에 대해 들어봤다.

발달장애인용 책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일반인들의 책을 발달장애인을 위해 쉽게 번안해서 다시 쓴 책들이다. 이전까지 발달장애인은 어릴 적 동화나 전래동화를 읽은 뒤 평생 책을 못 읽는 경우가 많았다. 전래동화만 계속 볼 수는 없는데, 일반 책을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용 책은 한마디로 일반 도서를 전래동화 수준으로 쉽게 다시 쓴 것이다.”

제작 과정이 일반 도서와는 다를 것 같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반 도서를 쉽게 다시 쓰는 게 출발점이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다. 초고를 발달장애인이 읽고 이해하는지 발달장애인들에게 직접 검수를 받아야 한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시 써야 한다. 이렇게 몇번 반복한 뒤에야 완성 원고가 나온다. 책에 있는 삽화도 발달장애인 삽화가에게 맡겨 내용을 이해하고 그리게 한 것이다.”

어떻게 발달장애인용 책을 만드는 엔지오를 꿈꾸게 됐나?


“2010년대 초반 유엔환경계획 한국위원회에서 근무할 때 환경 디자인 분야 기획을 했다. 그때 일반인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디자인적 요소를 고민했다. 환경 관련 정보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 누렸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그러다가 환경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전 분야에 적용해보자는 생각에 2014년 퇴사했다. 피치마켓은 그로부터 1년 뒤에 만들어졌다.”

‘피치마켓’은 경제학에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는 시장’을 가리킨다. 복숭아(피치)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품질도 좋고 맛도 좋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질 낮은 상품들이 판치는 시장’을 가리키는 ‘레몬마켓’과 대비되는 용어다.

처음부터 정보 불평등 해소의 대상으로 발달장애인을 생각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정보 불평등을 겪고 있는 여러 대상에 대해 스터디를 하다가 발달장애인들을 생각하게 됐다. 팀원 중 한명의 동생이 발달장애인인 것도 영향을 줬다. 발달장애인이 대통령선거 때 투표를 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참정권은 주어져 있지만, 사실상 현실에서는 참정권이 배제돼 있다. 후보들의 어려운 공약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피치마켓은 ‘느린학습자’라고도 하는 발달장애인용 책뿐 아니라 실생활에서 발달장애인의 정보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활동도 펼치고 있다. 지난 5월9일 치러진 제19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발달장애인용 쉬운 대선후보 공약집을 펴내기도 했고, 그림이 포함된 쉬운 근로계약서를 만드는 일도 하고 있다.

발달장애인이 겪는 정보 불평등의 해소 차원에서 보면 이번 서울도서관 복숭아 서가의 의미가 작지 않다.

“전용 서가가 없는 일반 도서관에는 발달장애인들이 가길 꺼린다. 산만하고 시끄럽게 보여 일반인들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번 협약은 이정수 서울도서관장이 장애인 독서권에 관심이 많아서 이루어진 면이 있다.”

아직은 서고에 책이 많지 않다.

“빠른 시일 안에 채우도록 노력할 것이다. 우선 서울도서관과 함께 발달장애인 초등학생을 위한 인물전을 만들기로 했다. 피치마켓 자체로도 1년에 6권 이상의 책을 만들어 기증할 생각이다. 현재 5년 안에 느린학습자를 위한 쉬운 청소년 필독서 100권을 번안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

함 대표는 “느린학습자용 책은 발달장애인들이 새로운 정보를 얻는 수단일 뿐 아니라 일반인들과의 소통의 도구라고 강조한다. 피치마켓에서 펴낸 책을 읽은 발달장애인의 가족이 “평생 ‘밥 먹었니’ 정도의 대화만 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주제로 자녀와 대화를 하게 됐다”며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는 것이다. 함 대표는 공공도서관의 발달장애인용 서가가 느린학습자와 일반인들이 더욱 활발히 소통할 수 있는 매개가 되기를 꿈꾼다고 밝혔다.

“이번 서울도서관의 복숭아 서가를 계기로 앞으로 전국 공공도서관 중 100개 이상의 도서관에 느린학습자 전용 복숭아 서가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느린학습자 전용 작은도서관도 설립하려고 합니다.”

느린학습자를 위한 함 대표의 발걸음은 그 누구보다 빨라 보였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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