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석의 좋은 건축 나쁜 건축 이상한 건축

관능적 볼륨감·조야한 아름다움 넘어선 ‘비움의 자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등록 : 2017-06-22 14:59 수정 : 2017-06-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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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높다란 위엄과 과도한 치장을 뽐내기보다는 오히려 조용한 비움의 미학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평가된다. 박물관 등 주변 300여 전시공간과도 조화롭게 공존한다.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이정향 감독, 1998)에서 철수(이성재)와 춘희(심은하)는 메우기 힘들어 보이는 거리를 좁히며 이야기를 만든다. 영화 속에서 과천 서울대공원 동물원 옆의 미술관은 부조화한 상황을 드러내는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문화계의 염원이던 국립현대미술관은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 자리에서 이리저리 떠돌다 1986년에 드디어 서울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동물원과 유원지의 곁으로 디밀고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런 생뚱맞은 처지는 미술관의 건립 계획이 88올림픽을 바라보고 시작되었다는 사실에서 절정을 이룬다.

고고한 예술은 먼지 나는 대처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인지, 도대체 문화적 감상의 기회 한번 갖기가 처삼촌 묘 찾아가기보다 심적 부담이 더 크니 나처럼 움직이기 싫어하는 게으른 사람이 문화시민 되기는 애초에 글렀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퇴근길에 선뜻 들를 수 있는 도심 미술관

그런데 가까이하기엔 너무 멀던 국립현대미술관이 몇년 전 서울에, 그것도 시내 한복판 경복궁 옆의 옛 기무사 자리에 전시관을 마련했다. 온 나라에 헛돈 쓰고 욕먹는 일이 부지기수여서 화낼 기운도 없는 세상에 이런 좋은 일도 없으란 법은 없구나 싶었다.

선진국 들먹이기가 마음에 걸리지만, 문화 선진국이라 일컫는 나라의 성공한 미술관들은 대부분 도심에 있다. 미술관의 역할이라는 것이 예술적 가치와 문화적 품격을 대중에게 계몽적으로 학습시키려는 것뿐이라면, 그깟 위치가 어디든 존망이 걸린 문제까지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도심에 있는 좋은 미술관은 그런 딱딱한 역할로 한정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 성취 가능한 다양한 가치의 스펙트럼을 획기적으로 넓힐 수 있다.

도심의 미술관은 예술 감상의 기회뿐 아니라 잊고 지내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찾으며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제공하는 정신적 휴식처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과천의 현대미술관도 유사한 가치가 없지 않으나, 단지 멀리 있는 수도승 암자를 찾듯 수고롭게 가야 하기에 선뜻 길을 나서기 힘들 뿐이다. 도심의 미술관은 가족과 시간을 나누고, 친구와 볕을 쬐고, 연인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내기에도 좋지만, 해 지고 퇴근하면 혼자 둘러보고 따뜻한 커피로 마무리하기에 더 없다. 이렇게 곁에 두고 마실 가듯 시내 갈 일 있을 때마다 들를 미술관이 있으니 새 친구를 만든 것처럼 마음이 좋다.

주변에 100개 넘는 화랑 등 300여개 전시 공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근처에는 경복궁, 덕수궁, 경희궁, 창경궁과 종묘가 어깨를 나누며 모여 있고 역사박물관, 화폐박물관, 농업박물관 등 특징 있는 박물관들이 여럿 자리한다. 또한 이 지역을 세상 어디 내놓아도 떳떳하고 확실한 자생적 문화지역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은 100여개가 넘는 크고 작은 화랑들과 영국 문화원, 프랑스 문화원 등 각국의 문화원을 포함한 300여개의 전시 공간들이다. 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이들의 중심에 용의 눈을 그렸고, 그 기운이 그늘진 골목까지 타고 돌아 지역의 맥을 뛰게 하고 서울을 숨 쉬게 한다.

이런 역사적·문화적 유무형 자산들로 가득한 환경이 대지로 주어진 서울관의 설계 공모에 참여한 어떤 건축가라도 주변과의 소통은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소통은 미술관으로 접근하는 길들과 연속적으로 열린 외부 공간의 만남으로 푸는 것이 당연했다. 건축가의 마음속에 흔히 숨어 있는 화려한 형태에 대한 욕망을 이런 땅 위에 드러내려 했다면 그 누구라도 모두의 비웃음을 샀을 것이다. 덕수궁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거나 동대문의 풍경을 바꿔버린 건축가라면 그랬을지도.

과하게 드러내지 않은 외피, 면과 조화

경복궁 길을 따라 오르면 옛 기무사 건물을 손봐 마련한 서울관의 붉은 벽돌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이 든 벽돌의 붉은 건물과 테라코타 판으로 된 베이지색 새 건물을 가벼운 유리벽이 무난히 중재하며 미술관 마당을 에워싼다. 마당은 열린 행위의 가능성을 담았고 유리벽 뒤의 로비는 이를 지켜보는 관람석이 된다.

종친부 뒤로 연결된 골목들에는 작은 상점과 카페가 즐비하고 골목을 가득 메운 에너지는 종친부 기와와 둥근 목조 기둥의 고즈넉함을 돌아 소음을 털어내며 잔디밭으로 흘러든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흩어지고, 넓은 하늘 아래 놓인 잔디 깔린 종친부 마당은 여유롭다.

마당은 미술관 내부에 하나가 더 숨어 있다. 전시 마당이라 하는 높은 천장을 가진 지하 공간으로 위층의 관람객들이 지나며 아래층의 관객과 함께 같은 공기를 나눈다.

지상에 드러난 미술관은 주변보다 높지도 넓지도 않은 7개의 과하지 않은 규모의 건물로 나뉘어 이웃한 건물들과 어우러지고, 이들 모두를 연결해야 하는 큰 공간은 지하로 숨겨 목적을 성취하면서도 주위를 압도하지 않는 현명함을 보인다.

각 건물을 감싸는 외피는 결코 남에 앞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한 벽돌, 테라코타 곡면판, 돌, 금속판, 유리 등을 선택하여 면의 조합을 이룬다. 건물과 건물, 길과 길을 이으며 이루어낸 하모니는 자신 속으로 침잠한 고요한 자태로 관능적 볼륨감이나 과한 치장을 앞세운 조야한 아름다움을 뽐내는 건물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이어지는 동선의 마디마다 문지방처럼 마련한 단순한 형태의 관문들과 튀지 않는 재료와 색의 변화도 흥미롭다.

미로 같은 동선, 목표 귀띔해주는 친절 아쉬워

벽돌 건물 문 안으로 들어서면 손님을 대하는 백화점의 판매대처럼 여러 직원들이 앞뒤로 늘어선, 재미있는 안내 카운터가 나오고 그들의 앞을 지나 전시 공간으로 넘어가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아쉬운 마음도 없지는 않다. 단체관광처럼 줄지어 차례로 학습하듯 전시물을 감상하는 미술관은 구닥다리며 촌스런 방식이며, 관객의 자유로운 동선을 허용하고 예술과의 개별적인 접점을 제공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이고 따라야 할 미술관의 경향이라 한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로같이 연속되는 전시실과 끝도 없이 계속되는 복도를 따라가다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어린 백성들이 긴장하며 찾지 않아도, 가야 할 길과 봐야 할 목표쯤은 귀띔해주는 친절이 필요하다. 아니라면 헨젤과 그레텔마냥 나갈 길을 찾기 위해 흘리며 다닐 빵조각을 준비하라 공지하기를!

비움으로 주변 특징 있는 건물·역사와 화해

노자의 <도덕경> 11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비어 있음에 그릇의 쓰임이 있고, 문과 창을 내어 방을 만들지만 그 비어 있음에 방의 쓰임이 있다.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주변의 특징 있는 건물과 역사를 화해시켰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배경으로 존재하길 자처함으로써 누구나 찾는 일상의 열린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 건축물은 2014년 한국건축가협회상과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해마다 쏟아지는 동의할 수 없는 건축상 수상작들의 홍수 속에서, 박수를 받으며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모처럼의 수작이고, 건축계의 전문가들과 일상을 사는 시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좋은 건축이다. 이 건물이 오래도록 사랑받고 한뼘한뼘 고르게 쓰이며 우리 곁에서 참하게 늙어가기 바란다. 이 더위 지나고 찬바람 불면, 미술관에 이르는 골목엔 빨간 감이 열리고 미술관 마당 높이 하얀 연 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글을 쓰고 있자니 또 가고 싶어진다.

글·사진 안준석 공학박사·건축가(AIA),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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