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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도전, 시대를 앞선 커피 향

신촌서 가장 오래된 원두커피집 2015년 ‘서울 미래유산’ 선정

등록 : 2017-05-25 16:58 수정 : 2017-05-2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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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째 카페 미네르바를 지키고 있는 주인 현인선씨가 원두커피를 내리고 있다. 현씨는 아이엠프 때 실직한 뒤 미네르바를 통해 새 삶을 개척했다. 8년 뒤면 카페 개업 50주년. 현씨는 벌써부터 오랜 고객들을 초대한 자축연을 머리에 그려보고 있다.
서울 연세대학교 앞 카페 미네르바는 ‘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원두커피 전문점’이다. 1975년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43년째, 같은 장소 같은 건물에서 날마다 가게를 열고 있다. 신촌의 유명 두 갈빗집 빌딩 사이, 작은 2층 건물 나무계단을 올라가 마주하는 실내 인테리어도 70~80년대에 시간이 멈춘 듯 20세기 말의 향수가 그윽하다.

지금은 어디서나 테이크아웃 커피를 볼 수 있듯이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커피를 많이 소비하는 우리지만, 이른바 ‘다방’이 주류이던 1970년대에 명실상부한 원두커피 전문점은 흔치 않았다. 특히 커피 원두를 산지별로 분류해 ‘사이폰 방식’이라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낯선 방식의 ‘커피집’은 마니아들에게나 통하는 문화였으니, ‘전위적’이라고 할 만큼 도전적인 시도였다.

이 앞서간 창업 아이템은 그러나 곧 ‘척박한’ 현실과 마주했던 것 같다. 경영난으로 주인이 몇번이나 바뀌었고, 폐업의 위기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럼에도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신선한 원두커피를 이국적인 방식으로 내려 마신다”는 미네르바의 ‘전통’은 용케 끊어지지 않았다. 2000년 초 현재의 주인 현인선(55)씨가 카페를 인수할 때까지 이미 25년의 세월을 지탱해온 미네르바는 온갖 전투를 치러낸 역전의 용사가 막 배치를 받은 신출내기 소대장을 맞이하는 듯했을 것이다. ‘새 사장 양반, 사이폰 커피라는 게 뭔지나 아슈?’

그렇게 현씨의 손에서 미네르바는 다시 18년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40여년, 수많은 카페들이 명멸해간 포연 자욱한 전선 같은 거리에 노을이 지면 카페 미네르바의 창문에는 어김없이 불이 켜진다. 이 10평 남짓한 고전적인 카페가 골목 상권의 퇴조, 원두커피 체인점 시대의 거센 파도에 떠내려가지 않고 꿋꿋이 백년가게의 등불을 밝히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신촌 연세대 앞의 유명 갈빗집 사이에 있는 미네르바는 너무 낡아서 최근 교체한 의자와 테이블을 빼고 나무벽, 격자 창문, 바 분위기 등은 1980년대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미네르바의 실내 모습.
직장을 잃고 시작한 카페 경영

주인 현인선씨는 이 질문이 건네지자 바의 서랍에서 빛바랜 작은 노트 한권을 꺼내온다. 18년 전 미네르바를 인수할 때 전 주인에게 건네받은 것이라고 한다. 1990년대 초반에 처음 작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노트에는 커피 내리는 법, 칵테일 제조법, 각종 거래처 전화번호 등 그때까지 미네르바에서 일했던 주인과 직원,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카페 운영에 필요한 정보를 물려주고 물려받은 흔적으로 빼곡하다. 그 노트를 한장 한장 펼쳐보며 현씨는 묘한 책임감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비록 장사가 안돼 가게를 넘기지만 미네르바에 대한 사랑만큼은 컸던 분들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나중에 같은 생각을 하게 됐지만, 돈보다 소중한 그 무엇을 다음 주인은 꼭 이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그 빛바랜 노트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신 미네르바(로마신화 속 지혜의 여신이자, 그리스 신화의 아테나에 해당함)는 어쩌면 현씨와 같은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왔는지 모른다. 자기와 더불어 이 카페를 삶의 터전이자 소명으로 일구어갈 사람. 현씨에게도 미네르바는 운명 같은 존재다. 서른다섯살이 되기 전까지 자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카페 사장을 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쳐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실연의 아픔을 오로지 일로 달래던 노총각 영업과장이었다. 타의로 실업자가 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방황하는 시간을 보내다 동료의 소개로 교회에 나가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자영업자의 길로 들어섰다. 10개월쯤 하던 장사가 전망이 없어 새로 얻게 된 가게가 우연히 들렀던 지금의 미네르바였다. 클래식이 흐르는 고풍스럽고 따뜻한 실내 분위기는 그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때가 2000년 봄이었다.

미네르바의 외관.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 신촌의 상권이 홍대 앞으로 넘어가고 대형 매장이 골목 상권을 잠식하면서 임대료를 감당 못 하는 가게들이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이 무렵 현씨는 중요한 결단 하나를 내린다. 메뉴판에서 술을 빼기로 한 것이다. 주류는 가장 이문이 많이 남는 품목. 가뜩이나 어려운데 술을 빼고 버틸 수 있을까? 그럼에도 현씨는 자신의 판단을 밀어붙였다. 원두커피 전문점이라는 미네르바 본연의 콘셉트에만 집중하자는 전략이었다. 이익이 줄어드는 것은 잠시뿐, 술손님 자리를 곧 커피 손님들이 채워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아슬아슬한 선택은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적중했다. 스타벅스와 같은 커피 전문 체인점의 등장이 원두커피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 체인점들의 대공습에 미처 대비를 못 한 ‘다방식’ 카페들이 줄줄이 문을 닫을 때, 미네르바는 전통 있는 수제 원두커피 전문점이라는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미구에 닥칠 시대의 파고를 앞서서 타넘은 셈이 되었다.

“신앙생활 덕분이었을까요? 어느 순간부터 제 생각이 이익보다 가치를 추구하는 쪽으로 바뀌어가더군요. 영업사원 때처럼 한푼이라도 더 마진을 남기는 데만 매달렸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앙의 힘이든 삶의 절박함이었든, ‘내 카페를 찾아온 사람이면 누구든지 가장 편안한 기분으로 좋은 음악과 커피를 맛보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다 가게 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 더 실질적인 변화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정부가 음식점에서 금연을 실시하기 훨씬 전에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실내 금연을 시도한 것도 그의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담배 연기가 사라진 카페는 매출이 반 토막 났으나 불과 반년 만에 손님들의 더 큰 지지를 받았다. 현씨는 카페 문 밖에 흡연 코너를 만들어 다시 찾아준 흡연 고객에게 보답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다

현씨는 좋은 임대인을 만난 것을 행운으로 꼽는다. 43년간 미네르바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18년째 현씨가 미네르바를 운영해올 수 있는 것도 건물을 헐거나 팔지도 않고 임대료도 합리적으로 책정해준 건물주 덕분이라는 것. 연대 앞 일대가 지난 시기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생각하면 건평이 60평 채 못 되는 이 작은 2층 건물이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다.

어떤 사람과 일했는지도 중요하다. 신앙생활에 몰두하던 초창기에 자기 일처럼 카페를 지켜준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현씨와 이들은 지금도 소식을 주고받는다. 지난해에는 알바를 같이하다 사랑에 빠진 커플이 주례를 부탁해오기도 했다. 고객들도 대를 이어간다.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를 냈더니 한 학생이 엄마가 알바를 한 곳이라며 찾아왔다. 아버지가 동문이 된 신입생 아들을 데리고 와서 엄마와 데이트하던 때의 미네르바 모습을 들려주기도 했다. 가끔 인터넷에 미네르바 소식이 오르면 외국에서 연락이 온다. “지금까지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미네르바는 2015년 서울시로부터 동숭동 학림다방(1956년경 개업)에 이어 “보존할 가치가 있는 추억의 장소”로 인정돼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됐다. 명동의 가무(1975년), 안국동의 브람스(1985년) 같은 카페도 단골들의 사랑 속에 하루하루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미네르바의 역사를 간직한 오래된 영업노트.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백년을 향한 꿈

카페이니만큼 커피 맛의 비결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답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좋은 재료와 주인의 정성. “커피 맛과 향기는 매우 민감해서 애호가들은 금세 알아차려요. 맛은 무엇보다 원두, 나아가 생두의 질에 많이 좌우됩니다만, 못지않게 사람의 정성이 중요합니다. 커피가게를 하는 사람은 커피에 대한 지식은 물론 자기 가게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네르바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다. 다양한 커피 맛을 제공하기 위해 사이폰 커피뿐 아니라 핸드드립, 에스프레소, 더치 등 손님이 원하는 방식의 커피를 내놓고 있다. 시대에 따라 유행이 바뀌어도 ‘조금은 촌스럽지만, 사랑과 낭만이 넘쳐 흐르는 곳’이란 미네르바의 모토는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일까? 주 고객층은 20~30대 여성과 학생들이지만, 10년, 20년 이상 미네르바를 찾는 단골이 수두룩하다. 그들에겐 사이폰 커피 한잔이 지나온 세월의 맛과 멋과 추억이다. 석사과정 여자 후배와 함께 온 연대 93학번 대학원생(박사과정)은 “1994년 2학년 때 처음 선배 따라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변함없는 분위기가 좋아 자주 찾는다”며 “학교 앞에 이런 카페 하나쯤은 백년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네르바는 현씨와 2008년 결혼한 아내가 번갈아 지킨다. 직원 없이 아르바이트생 7명이 일주일에 두번씩 돌아가며 나온다. 요즘은 아르바이트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인력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 하락하는 마진도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인건비, 관리비가 올라도 커피값을 올리기는 쉽지 않다. 체인점 가격과 경쟁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신촌 일대에 임대료 내면서 카페 영업하는 사람은 현씨가 유일하다고 할 정도로 개인이 직접 하는 카페는 거의 ‘문화재급’이 되어가고 있다. 그럴수록 현씨의 바람은 커진다.

“미네르바 개업 50주년을 향해 가면서 점점 동반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커피도 배우고 카페 경영도 배우면서 미네르바의 미래를 함께 열어갈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제2, 제3의 미네르바의 사장이든, 분점 창업자가 되든 그가 기다리는 사람은 “장인정신과 소명의식이 충만한” 젊은이다.

취재를 마치면서 현씨가 내놓은 옛 노트를 뒤적거려보다가 커피 물에 바랜 한 페이지에 시선이 머문다. 조금은 유치한 필치이지만, 자기가 만든 커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철철 넘치는 어느 커피 사랑 알바의 멘트가 구약의 ‘계시’처럼 남아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커피 속에 그대들이 찾고 있는 철학이 뜨겁게 끓고 있다. 이 한잔의 커피를 마셔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철학을 논하지 말라.”

백년 가는 커피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신촌의 가장 오래된 원두커피 전문점’ 미네르바에 가보시길.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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