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커 떠나고 ‘서울로’ 들어오고…명동 산책로가 뜬다

번잡함 줄어든 명동 걸어보기 네가지 방법

등록 : 2017-05-1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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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거리
명동의 바람이 순해졌다. 그동안 동대문과 더불어 해외관광객 1순위 관광지로 꼽혀온 중구 명동. 올 초부터 유커들이 썰물처럼 빠지면서, 갯벌이 드러나듯 명동의 표정이 바뀌었다. 희비도 엇갈리고 있다. 관광 특수에 기대온 상권은 한숨을, 행인들은 한갓진 날숨을 쉬었다. 시대의 요구와 이윤의 논리에 따라 도시가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독 명동의 번잡함이 아쉬웠던 건 도시에 켜켜이 쌓인 이야기가 변색되고 있다는 불안함 때문 아니었던가. 초록이 싱그러운 5월, 명동의 도보 코스가 조금씩 정비되면서 걷기 좋은 길이 생겨나고 있다. 걷는 일은 곧 기억하는 일이다. 기억은 새로운 이야기를 불러낸다. 여기에다 서울로까지 개통되니 명동 일대가 걷기 코스로 재발견되고 있다.

명동경찰서
‘걸으면 복이 온다’는 명동 산책

명동에 관한 낭만은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듯하다. 가난한 시인, 술 좋아하는 문인, 많은 예술가들이 명동을 누벼온 덕에 골목마다 이야기가 넘실댄다. 명동은 문화예술과 금융 중심지로서 한국 근현대사의 시간과 궤를 같이한다. 길의 골격마저 오랜 시간 보존되어, 애정을 담고 걸으면 멋과 낭만이 묻어나온다.

명동역에서 나오자마자 명동길 따라서 유행을 훑고, 유네스코길과 롯데백화점을 지나니 고종 황제의 얼이 담긴 원구단에 닿았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과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있는 사거리로 가서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경성 시절도 가늠하고, 신세계백화점 본점 옥상에서 시가지를 바라보며 작가 이상의 소설 <날개>의 배경임을 떠올렸다. 다시 남대문시장으로 발을 돌려 행상인들 속으로 숨어들었다가 숭례문에서 마무리하면, 서울의 600년 흥망과 역사를 아우른 셈이 된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명동성당
가볍게 걸으면 40분 남짓, 꼼꼼히 답사하면 2~3시간이 훌쩍 지난다. 중구에서는 이 길을 ‘부귀영화의 길’, ‘복이 오는 길’이라 이름 붙였다. 한국 최초의 성당이자 평화의 정신이 깃든 명동성당,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의 복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원구단, 그 밖에 돈에 관한 모든 것을 전시하는 ‘한국은행 화폐박물관’과 ‘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등을 아우르는 덕이다. 명동성당과 중국대사관 일대는 명동 속에서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아 명동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했다. 명동성당은 최근 지하 공간을 고쳐 ‘복합문화공간 1898 플러스’를 만들어 시민과 더 가까워졌다. 커피 가게와 대형 서점, 빵집이 들어섰다. 터의 영향인지 모두들 친절하고 여유롭다. 주말에도 고즈넉한 도심 휴식처로 잘 자리 잡았다.

명동 길거리 음식
‘표석’과 ‘건물’ 따라 명동 걷기

명동은 다방과 주점의 동네였다. 표석으로 남은 ‘은성주점’이 유명했다. 1960년대, 이곳을 중심으로 수십개의 다방이 앞뒤로 놓여 번화가를 수놓았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이봉구, 변영로, 박인환, 전혜린, 임만섭 등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들던 구역이었다. 술 한잔 기울이며 만들어진 시와 노래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이 밖에 명동의 표석은 몇개 더 있다. 명동성당의 계단 초입에 ‘이재명 의사 의거 터’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1909년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던 이완용을 칼로 찔렀던 독립운동가 이재명(1890~1910)의 흔적이다. 서울YMCA 앞에는 ‘이회영 집터’ 표석이 있다.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했던 이회영은 1932년 일본군 사령관 사살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순국했다.

문학과 예술 외에 건축학도들의 살아 있는 답사 장소인 곳도 명동 거리다. 한국전쟁 후 폐허가 된 명동에 모더니즘 건축물이 가득 들어서고, 지금까지 외관이 보존된 건물이 곳곳에 박혀 있어 도시를 읽는 기준이 됐다. 가톨릭회관(옛 성모병원), 한전프라자(옛 경성전력), 명동예술극장 (옛 명치좌), 유네스코회관 등 작은 골목마다 서 있는 건물들도 명동의 자랑이자 유산이다.

서울중앙우체국
연인·가족들과 만화골목 ‘재미로’

자녀들과 함께한 명동 나들이라면, 혹은 데이트 중인 연인들이라면, 만화골목 ‘재미로’도 들려볼 만하다. 명동역 3번 출구에서 남산 방향으로 오르는 언덕배기 골목이 만화거리로 단장되며, 밋밋했던 길이 색을 입는 중이다. 부모 세대의 <마루치 아라치>와 이모·삼촌 세대의 <달려라 하니>, 그리고 오늘날 대세 웹툰 작가들의 캐릭터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골목 초입보다 언덕을 오를수록 볼거리가 많다. 언덕 끝에 자리한 만화방 옥상에 오르면, 연인과 가족들이 삼삼오오 볕을 쬐며 만화책을 읽고 있는 풍경이 한가롭다. 현재 6호점까지 문을 연 ‘재미랑’에서는 지점별로 만화작품 전시, 만화작가 체험, 장난감가게, 만화방, 카페, VR(가상현실) 게임 체험 등의 공간을 무료 개방한다. 언덕 중반에 있는 만화공작소에서는 아이들과 만화 그리기를 배울 수 있다. ‘재미랑’은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개방하며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 쉰다.

남산 아래 옹벽까지 오르면 사진 찍기 좋은 공간이 많고, 여행서점과 커피 맛 좋은 카페들이 잇따라 자리 잡고 있다. 명동 중심가의 부산함을 피해 숨어들기 좋다.

명동거리 골목 음식점
서울의 삶과 기억, 명동의 맛

서울의 오래된 음식점들은 대개 종로, 을지로, 명동에 몰려 있다. 특히 명동에서 을지로 방향 골목에는 40여개의 맛집들이, 특히 30년 이상 된 맛집도 열다섯 군데 남짓 자리 잡고 있다. 이곳들은 해외관광객 안내책자에 소개가 빠져 반짝 특수를 누리지 못했지만, 인파를 피한 덕에 본연 그대로 살아남았다. 명동 맛집의 대표 격인 ‘명동교자’와 ‘명동돈까스’, ‘하동관’, ‘한일관’, ‘명동칼국수’ 등의 유명 식당들도 여전히 터를 지키고 있다.

최근에는 명동길과 유네스코길에 길거리 음식이 자리 잡아 밤의 활기를 만들고 있다. 남대문 방면으로는 유서 깊은 ‘갈치조림골목’이, 남산 방면으로는 ‘남산돈까스골목’까지 명동길이 이어진다. 걸어서 20분 남짓이니 길 따라 부담 없이 나서볼 만하다.

글·사진 전현주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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