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왕의 길을 거닐다

산을 닮은 처마의 곡선과 새 움 틔우는 자연과의 만남, 하루에 돌아보는 서울의 고궁

등록 : 2017-03-02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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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차도 바쁘고 사람도 바쁜 도시다. 소음 또한 촘촘해 고요할 틈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 있고, 고즈넉한 풍경이 있다. 고궁 얘기다. 가까이 있어 무심히 지나치기 일쑤지만, 잠시만 멈춰도 길 위에서 600여 년 전의 서울과 마주할 수 있다. 한두 곳만 선택해 가는 것도 좋지만, 올봄엔 고궁 다섯 곳을 한꺼번에 둘러보면 어떨까. 고궁끼리는 거리도 가까운 편이라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어딘가 자연을 닮은 궁궐들

온종일 산책이라고 특별한 날일 필요는 없다. 그저 하릴없이 걷고 싶은 날, 고즈넉한 풍경 속에 하루쯤 몸을 푹 담갔다가 빠져나오고 싶은 날, 그런 날 찾으면 될 일이다. 궁에서 궁으로 가는 길엔 근대사의 이야기가 고스란하고, 고궁들은 생각보다 크고 깊어 고요히 앉아 사색에 빠져들기 좋다. 어떤 궁에서는 아예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담장 너머 보이는 높은 건물이 외려 낯선 풍경이 되기도 할 것이다. 마치 도시 속의 섬처럼 고요해서, 2017년에 만나는 1400년대 같아서….

서울엔 모두 5개의 궁궐이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다. 이중 가장 유명한 곳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다. 왕이 정무를 보던 근정전과 연못 안에 세워진 경회루가 상징이다. 궁 안쪽에 있는 향원정도 풍치가 고운 곳이고, 봄날엔 앵두나무꽃 터지는 아미산도 볼만하다. 하지만 굳이 근정전 행각의 남서쪽 모서리를 탐낸다. 그 지점에서 보는 근정전의 지붕 선은 산등성이를 닮았다. 산등성이 같은 지붕 선을 따라 옅은 햇살이 또르르 밀려 내리다 처마 끝에서 톡 터지는 풍경, 이것이 경복궁이 숨겨 놓은 묘미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서로 이어져 있다. 창덕궁은 봄 정취가 화려한 곳이고, 창경궁은 궁궐의 지붕이 포개져 허공에 출렁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아무래도 봄날엔 창덕궁만 한 꽃놀이 명소가 없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공간 배치와 건축의 유연함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답게 창덕궁은 고궁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봄 소풍지다. 특히 4월이 곱다. 낙선재 뜰과 자시문과 승화루 앞이 매화로 밭과 담을 이뤄 그야말로 ‘꽃 대궐’이 된다.

창덕궁이 꽃으로 환할 때는 사람 또한 물밀듯 밀려든다. 이럴 땐 오히려 창경궁이 머물기 좋다. 그중에서도 통명전(왕이 조회를 하던 곳)이 오래 머물 만하다. 전각 안으로 들어가 대청마루가 깔린 곳까지 밟아볼 수 있어서이기도 하고, 통명전 뒤쪽에 있는 툇마루에 앉아 호젓함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래된 마루에 비쳐드는 따뜻한 햇볕이 다가오는 봄의 첫 얼굴 같다.

궁이 예쁜 데는 나무도 한몫한다. 덕수궁은 은행나무가 펼쳐내는 봄이 눈부신 곳이다. 초록물이 돌기엔 이른 시기라, 대한문에 드는 대신 정동 전망대에 올라 덕수궁을 본다. 정동 전망대(서울시청 서소문청사 13층)는 덕수궁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의 낭만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덕수궁은 물론이고 궁을 둘러싼 빌딩 숲과 인왕산까지 병풍처럼 펼쳐진다. 덕수궁 내부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앉으면 근대사의 한 페이지가 스치듯 지난다. ‘저기쯤이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꿇어앉힌 곳이겠지….’ 석어당쯤에 눈길을 둔 채 혼자 되뇌는 역사가 슬프다.

경희궁은 다른 궁들과 달리 규모가 크지 않다. 인파도 눈에 띄게 덜해서 조용히 거닐기에 알맞다. 구경할 게 크게 없으니, 그저 풍경의 일부가 될밖에. 햇살이 은근하게 스며드는 어느 전각 툇마루에 앉아 서울을 보면, 담장 너머 보이는 높은 건물이 외려 낯설다. 귓전을 따라다니던 소음 또한 가라앉는 자리다.


봄빛을 밟으며 걷는 고궁길

5개의 궁 중 가장 거리가 먼 덕수궁에서 창경궁까지의 도보 거리는 3.4㎞ 정도다. 추천 코스는 창경궁-창덕궁-경복궁-경희궁-덕수궁이다. 덕수궁에서 고궁 답사를 끝내는 이유는 야경을 염두에 둔 때문이다.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만 개방하는 다른 궁들에 비해 덕수궁은 밤 9시까지 개방해, 고궁 중 유일하게 평소에도 달밤 투어가 가능하다. 이른 아침에 길을 나서면 점심 먹기 전에 창경궁과 창덕궁을 거닐고, 경복궁과 경희궁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긴 다음, 밤 무렵 덕수궁에 닿는 코스다.

궁과 궁을 이으며 걷는다는 건 뭐랄까. 600여 년 전의 시간을 몸속에 들이는 느낌이다. 궁 저마다의 색채가 조금씩 다른 것도, 아침과 오후의 햇살이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도 직접 걸어야 알 수 있다. 그러다 문득 궁의 고즈넉함이 몸에 흥건하게 밴 사실을 알아챌 즈음이면, 정동길 어디쯤일 게다. 어쩌면 속살 포동포동했던 햇살이 몸에 깃들어 책갈피로 남게 되진 않을지. 어느 고궁의 귀퉁이에서 빌려온 햇살일지는 걸어본 사람만이 알 일이다.

글·사진 이시목 여행작가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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