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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선 잊힌 우리 삶의 흔적이 마주 보이죠”

골목답사 100회 이끈 김란기 문화유산연대 대표

등록 : 2016-12-29 16:06 수정 : 2016-12-2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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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답사 진행 100회를 앞둔 김란기 문화유산연대 대표가 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22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한 뒤 근처 골목길을 둘러보고 있다. 장수선 기자 grimlike@hani.co.kr

“이 정도가 인간적인 골목이죠. 너비 155㎝. 사람 간 친밀감을 높이는 데 이 정도 골목이 가장 좋아요. 교행하면 서로 눈인사할 수 있게 되고, 자연히 친밀해지구요.”

지난 10일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낡은 주택이 밀집한 ‘홍릉 부흥주택’ 골목 앞. ‘골목답사 길라잡이’ 김란기(63) 문화유산연대 대표는 10여 명의 일행에게 1950년대 말에 생긴 홍릉 부흥주택의 골목길에 대해 감탄사가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 세월 동안 500채 가까운 주택들과 골목길이 크게 흐트러지지 않은 채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있어, 보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참석자들 사이에선 “서울 시내에서 이런 골목길이 남아 있는 줄 몰랐어요. 기적 같네요”라는 반응도 나왔다. 참석자인 목은명(47)씨는 “이 동네는 제가 어릴 적 고무줄놀이하던 곳이에요”라며 이곳저곳을 손짓하며 반가워한다. 답사단 일행을 발견한 이곳 주민 염이근(67)씨는 “이곳에서만 45년 살았는데, 예전에는 다닥다닥 붙은 골목길에서 서로 인심 좋게 살았다”고 회상했다.

99번째인 이날 골목답사에는 전라남도 목포에서 새벽 버스를 타고 올라온 국어교사 등 40~50대 중년층이 주를 이뤘다. 시간 여유가 상대적으로 많고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40~50대 여성 참가자들이 단골 참가자라고 김 대표는 전했다. 가끔 골목답사에 참여한다는 이태겸(35·대학 연구원)씨는 “다른 답사와 달리 주변의 잊힌 공간을 산책하듯이 다니는 게 다른 점”이라며 “골목답사는 보통의 공간을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 대표의 골목답사는 섣달그믐날인 31일 100회째(정릉 골목답사)를 맞는다. 골목답사는 2012년 7월21일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그때 도심 재개발로 피맛골이 없어질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그 전에 함께 걸어보자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는데 의외로 많이 참석했다.”

4년 5개월간 평균 6~7㎞의 서울 골목길을 80%쯤 걷고, 인천·수원·청주·군산·전주·목포 등 지역도 20% 다녔다고 한다. 기관이나 단체의 지원 없이 순수하게 참가비(2만원)로만 운영하는 것은 초창기부터 일관된 방침이다.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답사 지역을 알리고 참가 신청을 받는 방식도 변함이 없다. 초창기에 1~2주에 한 번씩 진행하다 지금은 한 달에 한 번꼴로 정착됐다.

그렇다면 여러 답사가 있을 텐데 왜 골목일까? “도로가 대량 수송 물량을 위해 존재한다면, 골목은 작은 물건의 느린 이동이 있는 것 같아요. 빨리 가라고 빵빵거리지도 않고 밀지도 않으면서 일상 속 서민 삶의 흔적이 배어 있는 곳이죠. 쉽게 말해, 도로라는 시스템은 정복의 목적으로 생겨났다면 좁은 골목길은 생활과 삶을 위해 생겨난 곳입니다. ”


김씨는 골목길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아, 가족, 삶 등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의미를 붙였다. 그러면서도 “골목 안의 고추가 널려 있는 풍경, 아이들이 뛰어놀거나 연인들이 데이트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서울&> 창간 때부터 ‘김란기의 서울 골목길 탐방’이란 글을 격주로 연재한 김 대표는 대학에서 근대건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건축가이다. 박사학위 논문도 일제 강점기 근대한옥 생성 과정을 담았다. 여기에다 2004년 이후 문화유산연대 공동대표로, 부산 영도다리 보존운동, 명동성당 재개발 반대운동 등 문화재 보존운동을 펼친 문화재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것, 추레하지만 삶의 체취가 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김 대표는 단순히 해당 지역을 둘러보는 게 아니라 지역의 개발사가 담긴 소상한 자료를 제공해서 참가자들의 이해를 높이려 한다.

“제가 건축과 도시, 문화재를 공부하다 보니 이에 대한 자료를 많이 수집해왔습니다. 모자라는 것은 인터넷고고학(웃음)이란 방법론을 통해 채우기도 하구요. 모자란 것은 해당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을 초청해서 더욱 정확한 건축·생활사를 전달하려고 하구요.”

골목답사는 올해 9월부터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참가하는 ‘부자유친 골목답사’로 확대되고 있다. 서울시 건강가정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아 서울의 성곽길을 끼고 역사문화 유적지를 답사하고 인근 마을 놀이터에서 아버지가 어릴 적 하던 놀이를 함께 해보는 프로그램이다.

“막상 해보니 아버지들이 어릴 적 놀이를 대개 모르더라구요. 아버지들이 골목길에서 자치기, 공기놀이, 구슬치기, 닭싸움 같은 것을 하던 세대가 아니라 문방구 앞에서 ‘뿅뿅 게임’을 하던 세대더라구요(웃음). 그래서 강사들이 아버지들에게도 놀이를 가르쳐주면서 같이 해보니 아버지나 아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아이들은 엄마 손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갖는 것 같고, 아빠들은 핑곗김에 나왔는데 아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본인 역시 즐거운 것 같아요.”

내년부터 하는 ‘부자유친 골목답사’는 서울 25개 구청에서 답사객을 모집한다.

지난 10일 99차로 진행된 청량리 제기동 골목답사.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김도형 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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