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소식

“한글 배워 아내에게 문자 보낼 거예요”

성인문해교육 10년 맞은 영등포구 ‘와이디피성인문해교육센터’

등록 : 2023-03-16 15:22

크게 작게

영등포구 당산동3가 와이디피(YDP)성인문해교육센터에서 10일 늘푸름학교 초등1단계 과정 수업을 하고 있다.

‘60 넘은 사연 많은 학생들’ 공부 열중

출범 뒤 2022년에 교육센터로 확대

학력인정과 생활문해 과정 함께 운영

올해 고3 과정 대부분 “대학 진학” 꿈

“아, 어, 오, 우, 으, 이, 야, 여, 요, 유.”

선생님이 칠판에 붙인 글자 카드를 하나하나 가리키자 학생들이 또박또박 소리 내 읽었다. “소리를 잘 익혔는지 테스트할게요.” 이번에는 선생님이 작은 그림을 꺼내 보여줬다. “이거 뭐 같아요.” 선생님의 물음에 학생들이 “아기”라고 답했다. “그럼 ‘아’ 옆에 붙일게요.”

선생님은 다시 그림 하나를 들더니 학생들에게 물었다. “엄마.” 학생들이 신나게 외쳤다. 초등1단계 수업을 듣는 18명의 눈과 귀와 입이 선생님을 향해 열려 있었다. 10일 영등포구 당산동3가 영등포구청 별관 지하 1층에 있는 와이디피(YDP)성인문해교육센터에서는 만학의 열기가 봄을 지나 여름을 내달리는 듯했다.


영등포구가 2013년 성인문해교육을 위해 만든 은빛생각교실이 올해로 10년째를 맞았다. 2022년부터 와이디피성인문해교육센터로 확대했는데, 전국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하는 중등 학력 이하 성인을 위한 ‘평생교육학습장’이다. 이미애 와이디피성인문해교육센터장은 “학교 형태를 갖춘 문해교육센터를 구에서 직영하는 곳은 영등포구뿐”이라며 “국시비뿐만 아니라 구비를 따로 확보해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와이디피성인문해교육센터는 학력인정을 받을 수 있는 늘푸름학교와 학력인정과는 무관한 생활문해과정을 운영한다. 지난 2일 개학한 늘푸름학교에는 139명, 생활문해과정은 287명이 등록했다. 늘푸름학교 초등과정은 40주 동안 240시간을 이수해야 하는데 주 3회, 하루 2시간씩 수업한다. 초등과정은 1단계(1~2학년), 2단계(3~4학년), 3단계(4~5학년)로 구성된 3년 과정이다. 중등과정은 학년별 40주 동안 450시간을 이수해야 한다. 모두 성인용 국정교과서로 배운다.

지난 2일 늘푸름학교 초등 과정에 입학한 김영만씨(왼쪽)와 정왕모씨.

생활문해과정에서는 영어, 인문학, 정보기술, 문법, 동화 읽기 등을 가르친다. 영어는 알파벳부터 간단한 회화까지 5단계로 나뉘어 있다. 특히 정보화시대에 맞춰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무인정보단말기(키오스크) 등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는 정보기술 과정은 기초부터 심화까지 있다. 늘푸름학교 학생들을 위해 중학 예비, 수학 심화 등 과정도 있다. 중학 예비 과정은 초등과정을 마쳐도 곧바로 중학 과정에 적응하기 어려운 학생을 위해 운영하고, 수학 심화 과정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학생을 위해 운영한다.

“애 엄마한테 문자 한 통 보내는 게 소원이에요. 그것만 해도 소원이 없겠어요.” 어릴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에 다니지 못한 김영만(68)씨는 늘푸름학교에서 한글을 처음 배운다. 입학식 이후 이날 4일째 학교에 왔다. 초등 1단계반 수업을 마치고 나온 김씨는 “겨우 내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한글을 배울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김씨는 그동안 한글을 몰라 남몰래 고생을 많이 했다. “애 엄마가 동 주민센터에 가서 서류를 떼오라고 하는 날은 걱정이 앞서요.” 김씨는 약국에 먼저 들러 붕대를 사서 손에 감고 동 주민센터에 가는 꾀를 낸다. 주위 사람에게 손을 다쳐서 그러니 대신 좀 서류 발급 신청서를 써달라고 부탁할 핑계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 게 너무 한이 맺혀….” 김씨가 말을 잊지 못하고 울먹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함께 흐느꼈다.

김씨는 7년 전 운전면허를 구술시험으로 취득했다. “21번 시험을 봐서 합격했죠. 애 엄마가 울더라고요.” 김씨는 “써먹어야 하는데, 내비(내비게이션)도 사용할 줄 모르고, 접촉사고라도 나면 어찌할지 걱정돼 운전을 안 한다”고 했다. 김씨는 “얼른 한글을 익혀 아내에게 ‘고맙다’는 문자도 보내고 차에 태워 여기저기 함께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다.

늘푸름학교 교실 한쪽 벽에 응원 쪽지가 붙어 있다.

올해 초등 1단계 과정에 입학한 최남순(68)·최금순(64)씨 자매는 김씨와 함께 수업을 듣고 있다. 두 사람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입학도 안 시켰는데, 여기서 기역니은 배우니 너무 좋다”고 했다. 남순씨는 “남들이 문자 하는 게 제일 부럽다”고 했고, 금순씨는 “열심히 공부해 직접 쓴 글씨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정왕모(66)씨는 초등 3단계 과정에 곧바로 입학했다. 장남으로 태어난 정씨는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갈 때 학교를 그만뒀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동생들을 위해 하루빨리 돈을 벌어야 했죠.” 하지만 정씨는 항상 배움에 대한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었다. 정씨는 “이제 내 인생 살면서 공부할 수 있어 너무 좋다”며 “꾸준히 다녀 대학까지 가고 싶다”고 했다.

늘푸름학교는 올해 초등과정 7회째, 중등과정 3회째 졸업생을 배출했다. 전체 중등과정 졸업생 55명 중 32명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올해는 지난 2월8일 초등과정 23명, 중등과정 17명이 졸업했다. 늘푸름학교를 졸업하고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20여 명은 대부분 대학 진학을 꿈꾸고 있다. 이 센터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가 어렵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고등학교까지 모두 진학한다”며 “대학까지 가려는 분도 많다”고 했다.

서울에는 성인을 위한 고등학교가 5곳뿐이다. 영등포구에는 성인을 위한 고등학교가 없어 다른 자치구에 가서 배워야 한다. 와이디피성인문해교육센터는 앞으로 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 등을 만들어 대학 진학을 돕는 방안을 강구할 계획이다. 이 센터장은 “이곳에 오는 절반가량이 홀몸 노인으로 수업이 끝나면 따로 할 일이 없어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며 “수업이 끝나면 개인 소질 계발이나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충신 선임기자 cslee@hani.co.kr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