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450년 은행나무 주변, 사라진 마을의 흔적을 느낀다

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⑧ 강서구의 오래된 나무와 숲

등록 : 2020-10-22 14:59 수정 : 2021-04-15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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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농수산물도매시장 한쪽에 선 채

오랜 세월 사람들과 기쁨 나누던 고목

옛 마을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누군가 놔둔 과일엔 그리운 마음 담겨

강서농수산물도매시장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

꽃 피는 모습을 닮았다는 개화산, 그 주변 오래된 일곱 그루 나무와 숲속 한 그루 나무가 옛날얘기를 들려준다. 능말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조용한 주택가를 지키는 은행나무들, 지조 높은 향나무, 마을 보호수 등이 주인공이다. 강서농산물도매시장 은행나무는 지금도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 화곡동 빌라 골목 사이 작은 쉼터에 있는 측백나무의 내력은 480여 년 된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가양동 궁산 아랫말 은행나무와 성주우물터 이야기도 있다. 사각거리는 가을 햇볕을 받으며 강서구의 오래된 나무와 숲을 찾아 거닐었다.

개화동 상사마을 은행나무. 나무 아래 축대에 장미꽃이 피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단풍 길을 지나 지조 높은 향나무를 만나다


강서구 방화동 정곡초등학교 옆 작은 쉼터에 58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는 향나무가 한 그루 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나온 할아버지가 향나무 앞에 멈추어 햇볕을 쬔다. 푸른 자전거가 지나가는 길가 나무에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산책 나온 엄마가 보인다. 아이가 자는 사이 엄마는 향나무 옆에서 차 한잔 마신다. 오래된 향나무와 함께하는 오전 10시가 포근하다.

타고 온 마을버스를 타고 방화역으로 나간다. 역에서 멀지 않은 곳, 강서구 방화동 삼정초등학교 옆에 있는 공원 이름은 느티공원이다. 530년 정도 돼가는 느티나무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조선시대 중종 임금 때 정승을 지낸 심정이 느티나무를 심었다. 나무가 있는 마을의 옛 이름은 ‘능말’이다. 조선시대 선조 임금의 아들 이부(인조의 아버지. 추존 원종)의 능을 이 마을에 쓰려고 했다. 능이 들어설 터가 좁다는 이유로 능은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장릉에 들어섰으나 사람들은 이 마을을 ‘능말’이라고 불렀다. 느티나무 바로 옆에 5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도 있다.

지하철 9호선 개화역에서 직선거리 300m 정도 떨어진 조용한 주택가에 은행나무마을마당이라는 쉼터가 있다. 그곳에 250년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한적한 공원을 뒤로하고 500년 넘은 향나무를 보러 가는 길, 개화동 부석마을 표석을 지나면 은행나무길이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길 끝 소실점에서 연두색 시내버스가 머리를 내민다.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바람이 인다. 단풍 물든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반짝이며 흔들린다. 버스가 지나갈 때까지 그 풍경을 바라보다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마을 골목길이 마음을 차분하고 밝게 만든다. 그 골목 작은 쉼터에서 500년 넘게 자라고 있는 향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오랜 세월을 견디다 잘려나간 가지의 흔적을 간직한 채 몸을 비틀며 자란 나무를 보는 순간, 지조 높은 향기를 느꼈다.


마을 사람들이 지키는 나무, 마을 사람들을 지키는 나무

사라지지 않는 향나무의 잔상과 함께 개화동 상사마을로 접어들었다. 옛날 구멍가게 같은 가게 골목에 벽화가 그려졌다. 그림을 보며 걷는 골목길에서 450년이 다 된 은행나무를 만났다. 은행나무 아래 축대에는 장미꽃이 만발했다. 장미꽃과 오래된 은행나무를 한 틀에 넣고 바라본다. 은행나무 뒤로 개화산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열린다.

개화동 주택가 골목에 있는 향나무.

오르막 산길이 짧다. 숲길의 싱그러움도 잠시, 하늘이 열린 넓은 터가 나왔다. 개화산 전망대다. 전망 데크에 서면 한강을 건너는 방화대교의 붉은빛이 눈에 띈다. 강 건너편에 행주산성을 품은 덕양산이 있다.

조선시대 봉수대를 재현한 모형 봉수대를 지난다. 조선시대 개화산 봉수대가 있던 자리는 지금 자리에서 250m 정도 떨어진 군부대 인근이었다. 개화산 봉수대는 김포 북성산과 남산 사이에 있는 봉수대였다. 봉수대를 지나면 길은 숲으로 들어간다. 아라뱃길 전망대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른다. 숲속 데크길이 구불거리며 이어진다. 아라뱃길 전망대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전망을 감상하며 잠시 쉬었다 간다. 데크길 옆에 마을 보호수가 있는 쪽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데크길을 잠시 벗어난다.

마을 보호수 안내 글에 따르면 개화산은 신라시대에 주룡산으로 불렸다. 주룡이라는 도인이 이 산에서 수련했다. 도인이 머물렀던 자리에 꽃이 피어나서 개화산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마을 보호수가 있는 자리에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래된 나무가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가 있던 자리에서 마을제를 지냈다. 기원의 마음이 통해서였을까? 옛 고목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어린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보살피는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며 푸르게 자라고 있다.

데크길로 다시 돌아와 가던 방향으로 걷는다. 숲에서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 절벽을 사람들은 신선바위라고 부른다. 소나무 숲과 어울린 신선바위 풍경을 감상하며 잠시 머무른다. 조금만 더 가면 김포공항과 김포 들녘이 한눈에 보이는 ‘하늘길 전망대’가 나온다.


은행나무와 성주우물터를 지나 궁산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다

강서구 화곡동 빌라촌 골목 작은 쉼터를 지키는 480여 년 된 측백나무가 푸르다. 나무 옆에 원주 김씨 대종친회에서 세운 측백나무 식수 유래비가 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원주 김씨 일가가 조선시대 세종 임금 때 개성에서 양천현(지금의 화곡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그 손자 대에 지금의 자리에 측백나무를 심었다. 화곡동에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원주 김씨 집성촌이 있었다.

강서농수산물도매시장 한쪽에 450년이 다 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도로에서 보면 나무 밑동은 보이지 않는다. 은행나무가 뿌리를 내린 곳으로 내려가서 바라보았다. 누군가 나무 아래 과일바구니를 가져다 놓았다. 그의 기원이 담긴 듯했다. 팍팍한 일상을 견디며 사는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이 전해졌다. 예로부터 이 은행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기쁨과 슬픔을 나누던 나무였다. 도시화와 개발에 의해 옛 마을은 사라졌고 이 나무 한 그루만 남아 옛 마을을 상징하고 있다.

강서구 가양동 성주우물터와 오래된 은행나무. 사진 왼쪽 계단 위에 오래된 은행나무의 줄기가 보인다.

강서구 가양동에 450년이 다 돼가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조선시대 영조 임금 때 궁산에 소악루라는 정자를 세웠다는 이유의 5대조가 심은 나무라고 알려졌다. 양천 현령을 지낸 겸재 정선은 양천현의 이곳저곳을 그림으로 남겼다. 정선의 그림 <소악루> <빙천부신> <종해청조> 등에 이 은행나무가 등장한다. 은행나무 부근에 성주우물터를 알리는 푯돌이 있다. 양천현의 현령이 사용하던 우물이라고 해서 성주우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양천현아는 현청인 종해헌을 중심으로 동쪽에 객사 파릉관을 두었고 북쪽에는 향교가 있었다. 양천현을 품은 주산은 지금의 궁산이다.

은행나무와 성주우물터에서 직선거리로 300m 채 안 되는 곳에 양천현아가 있었다. 도로 가운데 현아가 있던 곳을 알리는 푯돌이 있다. 양천 향교를 지나 궁산으로 올라간다. 산책로 숲길을 걸어서 소악루에 도착했다. 소악루는 원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지금의 자리에 새로 만든 것이다. 소악루에서 한강 풍경을 바라보고 옛 성터인 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억새꽃이 제법 피었다. 해 지는 쪽을 바라보며 오래된 나무와 숲이 들려주었던 옛날얘기를 떠올려 보았다.

궁산 소악루.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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