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 진지 자리에 빛 예술 길 열렸다

전유안 기자, 빛의 터널로 탈바꿈한 유진상가 하부공간 ‘홍제유연’을 걷다

등록 : 2020-07-2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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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준공된 낡은 유진상가 하부

지난해 공공미술프로젝트 선정 뒤

어두컴컴한 터널 250m 빛의 예술길로

11㎞ 하천도 막힘 없이 흐름 이어져


작품 ‘온기’(팀코워크)는 42개 기둥을 빛으로 연결했다. 막힘 없이 흐르는 홍제천을 프레임에 담고 있다.

내 인생의 ‘빛’은 뭘까. 인생의 빛나는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일까.

여기 서울 시민들이 내놓은 답이다. ‘고된 노동 끝 주말’ ‘지갑 속 가족사진’ ‘처음으로 마련한 내 집 입주’ ‘긴 수험생활 후 얻은 합격 통지서’ ‘퇴근 후 반겨주는 집고양이’ ‘연인의 미소’ ‘월급통장’…. 각자가 품은 소소한 빛이 삶이란 긴 터널의 길잡이가 되는 모양이다.



옛 탱크 진지 자리에 빛 한 줄기

인왕초, 홍제초 학생 20명이 모여 그린 야광벽화 ‘홍제유연 미래 생태계’.

지난 18일 서대문구 홍은동 ‘홍제유연’(弘濟流緣)을 걸었다. 50년 동안 버려졌던 유진상가 하부 공간을 ‘빛의 예술길’로 탈바꿈한 현장이다. 막혔던 250m 구간을 열고 습한 동굴 같은 터널에 산책길을 만들었다. ‘홍제유연’은 물과 사람의 인연이 다시 흘러 예술로 치유하고 화합한다는 의미다. 유진상가는 1970년 지은 건물이다. 세운상가·낙원상가와 연배가 비슷하다. 이들과 나란히 고급 주상복합단지로 이름이 높았지만, 지금은 내부순환로에 걸쳐 왼쪽 지붕이 날아간 모양새나 여기저기 파인 몸체, ‘유진맨숀’이란 표기 등이 지난 시대의 유물임을 설명할 뿐이다.

주상복합 흔적 유진맨숀 A동

건물엔 남북 대립 시절을 알리는 군사적 단서들이 남아 있다. 1968년 김신조 사태 뒤 반공 표어가 울려 퍼질 때, 애초 북한군 남침을 대비해 세운 건물이기 때문이다. 비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구미가 당길 수 있다. 필로티(벽면 없이 하중을 견디는 기둥으로만 설치한 개방형 구조)로 지은 하부 공간은 100개 시멘트 기둥이 건물을 떠받친 모습이라 황량했을 법한데, 원래 탱크 진지로 사용하거나 유사시 기둥을 폭파해 방어선을 만들려던 목적이었음을 알면 수긍이 간다.

유진상가가 다시 빛을 본 건 서울시가 진행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 2019년 대상지로 선정된 뒤다. 지난 1년, 빛·소리·색·기술을 활용한 공공미술 작품들이 부지런히 들어섰다. 어두운 터널 속 탱크들 주차 자리로 조성한 터는 이제 창작자들이 채워 넣은 빛 조형물이 밝히고 있다.

내부순환로 건설로 일부가 뜯긴 유진상가 B동은 서대문구 공유캠퍼스로 활용 중이다. 무중력지대, 50플러스센터, 대한노인회 지회, 창업보육센터가 입점해 공공 공간 기능을 한다.


8개 빛 작품 감상하며 오감 활짝

입구에 있는 ‘홍제 마니차'는 시민참여형 작품이다. ‘내 인생의 빛'을 주제로 모은 시민 1천 명의 메시지를 움직이는 조각에 새겨 ‘1000개의 빛'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지난해 11월부터 3개월 동안 ‘서울시 홈페이지' ‘내 손에 서울' ‘서울은 미술관' 페이스북, ‘홍제유연' 인스타그램 등에서 모은 메시지다. 관람객이 직접 손으로 돌리면서 감상할 수 있다.

인증샷을 찍기 위해 시민들이 줄을 선 작품 ‘온기’(팀코워크)는 42개의 시멘트 기둥에 빛을 달아 빛으로 연결한 작품이다. 센서가 있어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체온 따라 조명 색도 붉은색부터 노란색까지 일사불란하게 바뀐다. 인터랙티브 기술을 적용한 사례다. 인왕초, 홍제초 학생 20명이 함께 완성한 ‘홍제유연 미래 생태계’는 야광벽화다. 생태전문가와 함께 홍제천을 탐험하고, 상상의 생명체들을 그림으로 그려냈다. 발광다이오드(LED)를 비추면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밖에도 ‘빛_빛의 서사'(뮌), ‘미장센_홍제연가'(진기종), ‘숨길'(팀코워크), ‘MoonSun, SunMoon'(윤형민), ‘Um…'(윤형민), ‘두두룩터'(염상훈), ‘사운드 아트'(홍초선) 등 물길 따라 설치된 8개 빛 작품이 어둠의 의미도 되돌아보게 한다.

‘MoonSun,SunMoon’(윤형민)은 잊힌 공간을 새롭게 채운 빛을 수면 위에 투영해 보였다.


터널 바깥엔 다시 우리가 사는 세상

홍제천을 건너는 시민들

유진상가는 홍제천을 복개해 얹힌 건물이라 자연의 흐름을 단절한 원흉으로 꼽히기도 했다. 종로구 평창동에서 흘러나와 서대문구를 지나 마포구를 거쳐 한강으로 향하는 하천(길이 11.95㎞)은 이번 ‘빛의 예술길’ 조성으로 마침내 단절 없이 흐르고 있다.

빛 예술품들을 길잡이 삼아 걷다가 깊은 터널 바깥으로 빠져나오면 다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작은 광장인 ‘두두룩터’는 시민 누구나 앉아 여름 바람을 쐴 수 있도록 조성했다. 졸졸 흐르는 하천에선 자맥질하는 홍제천 야생오리 가족들이 보이기도 한다. 늦은 오후 산책을 나온 70대 동네 어르신들은 “이 동네 토박이인데 옛날엔 풀이 우거져 음습했던 데에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게 만들어놔 좋다”며 “터널 속에도 재밌는 걸 만들어놔 으스스하고 재밌다”고 평을 내놓기도 했다.

새삼 빛이란 어둠이 깊을 때 유유한 자태를 내보임을 발견한다. 긴 터널 속에서 ‘내 인생의 빛’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홍제유연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운영한다.

터널 속 길을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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