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백운동천 계곡 아래, 단원의 집터였다

등록 : 2020-02-13 14:52 수정 : 2020-02-13 16:49

크게 작게

김홍도 전기작가 이충렬씨와 함께 단원의 서울 흔적을 찾아서

‘빨래터’는 삼청동천, ‘서당’은 통의동…역사 속 그림 생생히 소생

1월31일 전기 <천년의 화가 김홍도-붓으로 세상을 흔들다>의 저자 이충렬 작가가 저서를 통해 단원 김홍도의 서울 집터를 처음으로 특정한 ‘백운동천’ 바위 아래에서 김홍도가 자신의 집 안 풍경을 그린 <단원도>가 담긴 책을 펼쳐 보이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조선시대 불세출의 화가 단원 김홍도(1745년 영조 21년~1806년 순조 6년?)의 서울 집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1월31일 오후, 단원의 파란만장한 삶과 예술세계를 그린 전기 <천년의 화가 김홍도-붓으로 세상을 흔들다>의 저자 이충렬(66)씨의 안내에 따라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터널 바로 위 백운동천 계곡으로 올라갔다.

이씨는 ‘백운동천’(白雲洞川)이라고 새겨진 각자바위 앞에서 단원이 1784년 그린 <단원도>가 수록된 전기 255쪽을 펼쳐 보였다. “단원도를 잘 보세요. 그림 속 배경이 바로 이곳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단원도 속 배경과 실제 백운동천 계곡은 비슷해 보였다.

김홍도는 1784년 단원도를 그리고 그 위 왼편에 “(창해 선생이) 나의 조촐한 집 단원을 찾은 것은 1781년(신축년)이었다”고 적어,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그림임을 밝혔으나 그 집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의 해석이 구구했다.

그동안 단원도에 나오는 집의 위치에 대해서는 미술사학계는 창해 정란이 화제(그림의 제목)에 쓴 ‘금성동반’을 ‘금성산의 동편 물가’로 해석했으나 이씨는 김홍도 전기에서 한양도성 연구자인 홍순민 교수(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의 도움으로 백운동천 계곡이라고 처음으로 특정했다. 홍 교수는 “금성은 특별한 지점이나 성곽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성 정도의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며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한양에서 집의 위치가 바위 기슭을 타고 내려오는 성벽의 동편이 되려면 인왕산의 마지막 백운동천의 상류 계곡 외에는 없다”고 밝혔다. 또한 홍 교수는 조선시대에는 개천을 중심으로 주거지가 있었던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이씨는 “전기를 쓸 때 주변 학문과 협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례”라며 “단원도 배경에 대해 특정할 수 없어 애를 태우던 중 페이스북 친구를 통해 홍 교수랑 연결돼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전기는 또 <서당> <씨름> <빨래터> 등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김홍도의 풍속화 걸작을 그리게 된 배경과 그 역사적 의미를 사료를 바탕으로 흥미롭게 서술해 눈길을 끈다.

서른 살 무렵 장삼이사의 삶을 그리고 싶어 하지만 그 삶을 그려 찾을 수 있는 도와 이치가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는 김홍도에게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 중 한 명인 강세황(1713~1791)은 “그렇다면 네가 그리고 싶은 진경은 어디에 있겠느냐?”고 되물어 진경은 사람들 삶 속에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나중에 김홍도의 속화를 본 강세황은 “내가 볼 때 이 그림은 왕조 400년 동안 이룩한 것 중에서도 새로운 경지다. 정말 장하다”며 중인과 평민의 ‘진경’을 절묘하게 포착한 제자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씨는 “오로지 사람들의 마음과 통하는 그림을 그리는 일만이 엄혹한 신분사회에서 (중인 신분인) 김홍도가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서당>은 통의동 부근의 서당일 것으로 추정했다.

“해가 바뀌고 봄기운이 돌 무렵 김홍도는 마성린과 함께 인왕산 아래에 있는 서당을 찾았다. 서당은 양반과 중인들이 많이 사는 북부 순화방(현재 통의동). (…) 훈장의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안심이 된 듯 아이는 곧 울음을 그쳤다. ‘재미있는 장면이 나왔다.’ 김홍도는 전날 숙제를 안 해온 학동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혼자서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이씨는 단원의 걸작 중 하나인 <빨래터>의 장소와 관련해 두 번째 근무처인 장원서가 있던 삼청동천 상류에 있던 절벽바위 부근이라고 특정했다. 삼청동천은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로 북창교, 소격교, 장원서 앞 다리를 지나 건춘문을 따라 흘러 내려오는 한양 5대 계곡 중 하나다. 그 5대 계곡 중에서도 계곡이 가장 깊고 수려한 삼청동천이 으뜸이라 여름에는 더위를 식히려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김홍도는 북쪽 골짜기에 올라 너럭바위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렸는데 열심히 방망이를 두드리는 아낙들 모습뿐 아니라 조금 멀리 떨어진 바위 위에서 쥘부채로 얼굴을 가린 젊은 선비가 아낙들을 훔쳐보는 모습을 끼워넣어 그림에 재미를 더했다.

송석원(옥인동 47번지 일대) 터도 김홍도가 그림으로 남긴 흔적 중 정확하게 위치를 찾아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다.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는 그윽한 달빛 아래 펼쳐진 송석원 시회(시를 짓거나 토론·감상 등을 하는 모임) 광경을 담은 그림이다.

송석원은 당시 중인 시인 중 최고의 시재를 가졌다고 평가를 받는 천수경(?~1818)의 집으로 ‘소나무 숲 바위 옆에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천수경의 집은 인왕산 자락 아래 옥류동 근처 소나무 숲에 있었다. 천수경은 ‘송석원 시사’를 결성하고 1786년 7월부터 봄가을 수백 명에 이르는 시인이 모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백전’을 열었는데 김홍도가 그때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100권이 넘는 자료 섭렵해 김홍도 그림 위치 찾아내”

집터, 한양도성 연구 홍순민 교수 도움

‘천년의 화가’, 소설 기법 재미 더해

‘대화체’로 김홍도 현재성 획득 힘써

송석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송석원 집터의 각자바위. 혼란기에 각자는 없어지고 지금은 모형글씨만 붙어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저자 이충렬씨는 송석원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근처 인왕부동산의 이영문(82)씨를 소개했다. 62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는 이씨는 “송석원 터 전체 규모가 1만5천 평이었다고 하더라고요”라며 취재진을 송석원이란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던 송석원 터로 안내했다. 그러나 현장은 드라마 촬영 중이어서 양해를 얻어 잠깐 각자바위만 찍고 돌아왔다. 이씨는 “예전에 송석원이라는 글씨가 각자돼 있었는데 혼란기에 각자가 없어졌다고 들었다”며 “159평에 달하는 각자바위가 있던 송석원 집터는 지난해 서울시가 매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집터 위에 인왕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길이 있었는데 오래전 복개공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귀띔했다.

송석원 일대를 잘 알고 있는 인왕부동산의 이영문(82)씨가 김홍도 전기작가 이충렬(66)씨에게 예전에 인왕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길이 있었는데 오래전 복개공사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이충렬씨는 4~5년간 조선 영·정조 시대사와 중인들의 신분사, 도화서 화원들의 구성과 체제, 단원 주변 인물의 문집, 도성 연구자료, 옛 지도, 궁궐 연구 책 등 100권이 넘는 자료를 수집하고 섭렵한 끝에 단원 주요 그림의 배경 설명과 단원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설 형식으로 소환했다.

그러나 80~85%는 사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이씨는 말한다.

“사료를 인용한 게 아니라 녹여내 재구성한 것이죠. 주인공이 살아 움직여야 그 인물이 역사성에 머물지 않고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책 속에 대화가 많이 나오는 것도 주인공을 살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이충렬 작가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위에 표시한 단원 김홍도의 유적지. 화살표로 표시된 부분이 백운동천이며, 오른쪽 그림은 백운동천을 배경으로 자신의 집 안 풍경을 담은 <단원도>이다. 세모 표시는 송석원이다. 경희궁에서 김홍도가 영조 어진을 그렸고, 창덕궁은 정조 어진을 두 번 그린 곳이다. 초록색 네모 표시(창덕궁 옆)는 단원이 2년 동안 다른 화원들과 어울려 주문 그림을 그리던 중부동 강희언의 집이다. 이충렬씨 제공

임금의 어진을 세 번이나 그린 어용화사라는 명예로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또 중국화보나 왕실 기록화를 잘 그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시대와 인간의 모습을 쉬지 않고 화폭에 남아낸 조선의 천재 화가. 그러나 김홍도는 종6품 관원이 치르는 수령강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파직당하는 수모를 겪거나, 연풍현감 시절 의금부 압송을 당하는 등 굴곡 많은 세월을 살다 아들에게 “네 선생님에게 월사금을 보낼 수 없어 탄식한다”고 마지막 편지를 남긴 채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충렬 작가도 나름 부침 있는 세월을 살았다. 고3 때 집안이 몰락해 1976년 대학 3학년 때 가족 전체가 남미로 이민을 떠나 80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노동의 삶과 부동산 개발 사업으로 자본을 모았으나 엘에이 폭동 등으로 쫄딱 망했다. 그 뒤 1990년대 중반 멕시코와 맞닿은 국경도시로 이동해 잡화가게를 운영하며 그림을 모으기 시작해 미술에 눈떴다. 외국인이 그린 한국 그림이나 이왈종, 사석원 등 한국 현대 화가의 그림이 쌀 때 조금씩 사들여 100점 이상 모았다. 2006년 무렵 ‘이충렬의 그림이야기’를 연재하는 등 미술 블로거로 필력을 날리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을 출간해 일주일 만에 1쇄 5천 권을 팔아치웠다.

그다음 책으로 간송 전형필 전기, 혜곡 최순우, 화가 김환기, 김수환 전 추기경, 동화작가 권정생 등 8권의 전기를 펴냈다. 9권째 전기로 고 이태석 신부의 흔적을 찾기 위해 3주 예정으로 오는 4~5월께 남수단을 방문한다. 전기문학의 1세대 작가로 전기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듣는 이씨는 9번째 전기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휴식기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책 나올 때마다 반응은 있지만 전기작가로 살아가기에는 예상에 미치지 못해요. 부끄럽게도 동력을 상실해가는 과정이에요. 사실 그게 두려워요. 한 사람의 인물을 재구성하려면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사와 인물사는 물론 주변사까지 100권 이상의 자료가 필요하고 유료 논문도 다운받아야 해서 자료 조사 비용만 최소 300만~500만원 소요 된다고 하는데 자료 구입비를 보전해주는 출판사는 거의 없어요. 1만 권은 팔아야 자료비와 취재비가 보전되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게 쉽지 않아요.”

김도형 선임기자 aip209@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