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년 전설의 술, 인민해방군 만나 현대의 술이 되다

이인우의 중국 바이주 기행 ③ 허난성 바오펑현 보풍주

등록 : 2020-02-13 14:19

크게 작게

1947년 해방군 소대장이 보풍주창 시작

옛 모습 막사엔 병사들의 노래 들리는 듯

전통 주조법은 ‘국가무형문화재’ 등재

새지 않는 싸리나무술통 ‘주해’도 유명

중국 정부 공식 지정 17대 명주의 하나

중국 허난성 뤄양(낙양)에서 낙수를 건너 남쪽으로 달리면 여하(汝河)가 나온다. 여하의 물줄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여러 물줄기가 합쳐지는 비옥한 땅이 펼쳐진다. 이 풍요로운 땅의 중심 고을이 허난성 핑딩산시 바오펑현(寶豊縣·보풍현)이다. 보배롭고 풍요하다는 이름처럼 좋은 물과 좋은 토질을 갖춘 곡창지답게 수천 년 전부터 좋은 술의 산실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바이주(白酒) 계통의 보풍주가 이 고장을 대표하는 술이다.

보풍주창은 국공내전 당시의 인민해방군에서 시작해 군영과 국영 주창을 거쳐 2002년 민영화됐다. 주창의 한 창고에는 홍군을 상징하는 별과 ‘양주2차간’이라는 술제조창 이름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유명 브랜드 위주로 바이주가 소비되는 우리나라에선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보풍주는 수천 종 바이주 가운데 단 17종만이 존재하는 “공식적인” 중국 명주의 하나이다. 1989년 마지막으로 열린 제5차 중국 주류평가대회에서 금장을 수상하면서 얻은 소중한 타이틀이다. 보풍주는 허난성에서 청향(淸香)형 바이주를 대표한다. 구이저우마오타이(구이저우성), 서봉주(산시성(섬서성)), 노주노교(쓰촨성) 등과 함께 신중국 최초(1952년)의 4대 명주에 뽑힌 행화촌분주(산시성(산서성))와 청향형 바이주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청향형 바이주는 본래 추운 북방의 술이다. 설원의 말 탄 전사들이 창칼을 부딪치는 듯한 강렬한 맛이 일품이다. 거친 사나이의 호흡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긴 여향(餘香)은 거듭 한 잔을 더 청하게 만든다.

보풍주 대표 브랜드인 ‘국색청향’ 시리즈.

보풍주업유한공사는 대표 브랜드 ‘국색청향’을 비롯한 자사의 보풍주에 대해 “순정한 청향을 갖춘 중국 미도(味道)의 수위이다. 맛은 솜처럼 부드럽고 달며, 목넘김은 매끄럽고 입안은 상쾌하다. 마시고 난 뒤에도 향기가 오래 이어진다”고 자랑한다.

 바이주는 대부분 누룩을 고체발효한 술이다. 누룩은 술의 뼈라고 할 만큼 중요한데, 보풍주 또한 누룩의 차이에서 품질과 풍격의 뼈대가 만들어진다. 보풍주의 누룩은 보리, 밀, 완두를 섞은 대곡이다. 원료의 분쇄 정도, 수분과 온도에 따라 홍심곡, 후화곡, 청치곡 등 세 종류의 원료 덩어리를 만들어 비법에 따라 배합한다. 이 과정이 누룩의 성질을 좌우한다고 한다. 배합한 덩어리를 고체의 벽돌 형태로 만들어 실내에서 공기와 접촉하게 놔둔다. 이 기간에 여러 공정을 거치면서 유익한 미생물이 생성된다. 술의 발효는 땅에 묻은 질항아리에서 하며 온도는 중저온에 맞춘다. 술의 원료는 고량이다. 양조 방식은 전통적인 ‘청증이차청’(淸蒸二次淸: 원료를 쪄서 1차 증류한 뒤 원료를 추가해 재차 증류하는 청향형 제조 방법의 하나)으로 한다. 증류는 저온에서 하며 추출된 술을 등급에 따라 질항아리에 담아 오랜 기간 저장한다. 보풍주 주조 기술은 2008년 우리의 무형문화재에 해당하는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1948년 바오펑에 진주한 홍군 지도자들. 왼쪽 둘째가 덩샤오핑이다

 보풍주의 역사는 전설상으로는 4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구하다. 11세기 성리학자 정호가 관리로 부임해 양조기법을 정립한 일이 유명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바이주 보풍은 20세기 중국 내전 속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1947년 11월 일단의 홍군이 바오펑을 점령하고 해방구를 설치한다. 류보청(유백승)과 덩샤오핑(등소평)이 이끄는 이른바 ‘유등대군’의 한 병단이 북쪽 태항산맥에서 황하를 건너와 하남의 서부 곡창지대를 접수하고 머지않아 양쯔강을 건너 북상해올 공산당 주력군을 맞이하기 위한 작전의 일부였다. 이때 바오펑에 진주한 인민해방군의 한 소대장과 현지 교사가 마을 양조장에서 병사들을 위해 바이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듬해 유등대군의 총사령부가 바오펑에 설치되자, 병사들이 만든 인민해방군 제5군 분구주국(分區酒局)은 중국공산당 중원군(中原軍) 군수창이 되었다. 보풍주문화박물관은 전시관 초입에 덩샤오핑 등 당시 바오펑의 중원군 지도자 5명의 사진과 함께 “해방전쟁기의 보풍주는 전장에서 병사들을 위한 의료구호품으로서 중원 해방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라는 문구를 자랑스럽게 걸어놓고 있다. 전시의 군영 보풍주창은 1953년 국영 주창이 되었고, 1997년 반민반관의 집단인민공사 형태로 바뀌었다가 2002년 주식회사로 민영화됐다. 그러나 옛 군영 막사를 여전히 그대로 쓰는 주창 건물들은 이 술의 뿌리를 잘 말해준다. 이처럼 보풍의 바이주는 20세기 프롤레타리아 병사들의 손에서 시작됐다. 중국 북방의 농민 출신들이 황하 이남의 땅에 들어와 만든 술이기도 했으니, 하남의 보풍주가 북방의 청향형을 갖게 된 배경도 이로써 짐작해볼 수 있다.

보풍주창에서는 싸리나무 술통 ‘주해’(酒海)가 빠질 수 없는 명물이다. 싸릿가지로 만든 바구니가 술이 한 방울도 새지 않는다면 믿을 수 있을까. 주해는 중국 산시성(섬서성)과 쓰촨성을 가르는 친링산맥에서 나는 싸리나무로 만든 것이다. 지금은 본고장 산시성의 서봉주창과 이곳 보풍주창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니 아마도 전쟁시의 군대 이동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주해는 싸리나무 바구니 내벽에 혈료(닭 등 동물 피로 만든 접합료)와 석회 등을 섞어서 만든 접합제로 뽕나무 껍질과 백면포(白棉布)를 백 번 이상 붙인 다음, 달걀흰자, 밀랍, 익힌 유채씨기름(菜子油) 등을 일정한 비율로 발라 코팅한 뒤 서늘한 공기와 햇볕에 말려 완성한다.

술이 한 방울도 새지 않게 만들어진 싸리나무 술통 ‘주해’. 1천 년의 연원을 가지고 있다.

이런 주해 제작의 역사는 근 1천 년에 달한다고 한다. 보풍주창의 주해는 용량이 1t이 넘는 거대한 크기로 수십 개가 즐비한 것이 장관을 이룬다. 특히 놀라운 것은 “술을 담으면 한 방울도 새지 않고 몇 년이고 저장되는 반면, 맹물을 담아놓으면 결국 말라 없어진다”는 것이다. 설명문에 따르면 “주해는 스스로 저장과 숙성 기능을 가지고 있다. 주해의 자체 성분이 술 중에 용해되어 독특한 향미를 만들고, 일부 특수 성분이 원주 속의 쓰고 강한 맛을 감소시키고 잡냄새를 없애준다”고 한다. 아무리 읽어도 미스터리 하기는 마찬가지다.

보풍주는 당송시대부터 궁정에 바쳐지는 공주(貢酒)였다. 역사서에는 이 시기의 바오펑 풍경을 “술밥 찌는 굴뚝 연기가 숲을 이루고, 펄럭이는 주점 깃발이 노변의 풀처럼 많았다”고 전한다. 북송시대에는 오늘날의 국가전매청이 설치될 만큼 양조와 판매의 중심지였고, 12세기 금나라 때는 술 사업으로 거부를 이룬 사람이 100여 가에 이를 만큼 전국에서 주세를 가장 많이 내는 현이었다. 1915년에는 중국 밖으로 나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파나마 만국박람회장을 온통 바이주 향기로 뒤덮는 소동을 일으키며 중국 술을 세계에 알린 주역이었다.

역대로 수많은 명사와 문인들이 바오펑의 술을 노래했다. 그러나 이 모든 명성도 인민해방전쟁 시절 보풍주를 나눠 마시던 병사들의 뜨거운 마음을 가리지 못한다. 명주는 부유한 문화의 도구이지만, 술 그 자체는 민중의 삶이 아니겠는가. 홍군의 영도자 마오쩌둥은 술은 별로였지만 시에는 뛰어났다. “이토록 아름다운 강산이기에/ 수많은 영웅들 다투어 허리를 굽혔다네/ 아쉽게도 진시황과 한 무제는 문채가 모자랐고/ 당 태종과 송 태조는 시가 부족했고/ 일세의 영웅 칭기즈칸은 활쏘기밖에 몰랐다네/ 그러나 이 모두 지나간 일/ 정녕 풍류 인물을 꼽고 싶거든/ 지금 이 시대를 돌아보라.”

 수천 년 변함없는 산하와 조국해방에 뛰어든 지금의 인민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영웅이라는 찬가이다. 술에 그런 역사를 담을 수 있는 것은 실로 부러운 일이다. 보풍주창의 옛 막사 앞에 서니 술을 따른 찬합을 높이 들고 병사들이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의 대오 태양을 따라 전진한다. 조국의 대지를 밟고서, 인민의 희망을 어깨에 지고서…. 모름지기 이렇게 마실 때 모든 술은 명주가 된다.

중국 허난성 핑딩산시/글·사진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