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조조가 술잔 높이 들어 찬양한 중국술 원조

이인우의 중국 바이주 기행 ② 허난성 뤄양시 루양현의 하남두강주

등록 : 2020-01-30 14:16 수정 : 2020-01-31 14:29

크게 작게

후한 등 9개국 수도인 뤄양의 대표 술

조조, 영웅시에서 “오로지 두강” 헌사

‘3잔 마시고 3년 못 깨어나’ 일화 유명

1971년부터 현대식으로 바이주 생산

현무암 지층…술 숙성·저장 최적 조건

하남두강주

“술을 두고 노래하겠노라.”(對酒當歌)

삼국지의 영웅 조조는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였다. 그가 중원의 명사들을 불러모은 연회 자리에서 술잔을 높이 들고 시를 읊는다. “산은 높기를 두려워하지 않고(山不厭高), 바다는 깊기를 마다하지 않는다(海不厭深).”


마음 맞는 인재를 산해처럼 모아 천하를 평정하고 싶다는 웅지를 드러낸 이 ‘단가행’(短歌行)이 역사에 남으면서 또한 유명해진 것이 있다. 뤄양(洛陽·낙양)의 명주 두강(杜康)이다. ‘단가행’은 이렇게 시작한다. “술을 두고 노래하겠노라/ 인생은 얼마나 되나(人生幾何)/ 그저 아침이슬 같은 것(譬如朝露)/ 지난날 고난도 적지 않았지(去日苦多)/ 비분하여 강개하던 나날(慨以當慷)/ 근심은 쉬이 떠나지 않았네(憂思難忘)/ 어떻게 이 근심 풀 수 있을까(何以解憂)/ 오로지 두강뿐이라네(唯有杜康).”

삼국지의 시대에 이미 두강은 술을 대표하고 있었다. 두강은 조조가 닦은 일통천하의 길을 따라 전 중국에 술의 대명사로 퍼져나갔다. 오늘날에는 인구 1억의 중국 허난성을 대표하는 바이주의 하나로 손꼽힌다.

중국 허난성 뤄양시는 중국 4대 고도의 하나이다. 창안(현재의 산시성 서안)이 서도라면 뤄양은 동도였다. 동주와 후한 등 9개 나라가 이 도시에서 명멸했다. 송나라 때의 중국통사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은 “역사의 흥망을 알고 싶거든 낙양을 보라”는 통찰을 남겼다. “낙양의 지가를 올린다”는 말은 이 도시가 고대 중국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압축한다. 두강이 바로 그 번성했던 낙양의 술이다.

하남두강주의 주생산지는 뤄양시 루양현(汝陽縣)이다. 뤄양에서 남쪽으로 용문석굴이 있고,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15㎞ 정도 가면 여하(汝河)가 흐른다. 그 일대가 루양이다. 두강주 제조를 업으로 해온 사람들은 “마을마다 샘이 100개가 있다”는 이 일대를 두강촌, 두강촌을 감싸고 흐르는 강물을 두강하라 부르며 이곳을 두강주의 시원으로 자부하고 있다.

하남두강주를 생산하는 회사는 낙양두강(하남두강의 지주회사)이다. 현대식으로 바이주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1971년이라고 하니 두강바이주 역사는 50년이 된다. 기자가 방문한 루양의 하남두강은 주창(酒廠·양조장) 면적이 100만㎡에 달하며 연간 원주 생산이 1천t에 이른다. 10여 계열에 100여 종의 두강주를 생산하고 있다. 원료는 수수와 밀이며, 향기로는 농향형으로 분류한다. “현무암 지층의 미네랄이 풍부한 광천수를 사용한다.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을 접목해 술맛이 맑고 투명하고 부드럽고 진하며, 입안에서 오래도록 풍미가 남는 것”이 자랑이다. 상표권 분쟁으로 침체기를 겪기도 했으나 빠르게 사세를 회복해 현재는 전국적으로도 10대 바이주 생산업체의 반열에 들고 있다.

하남두강주가 자랑하는 것 중 하나가 ‘아시아 최대’를 자부하는 지하 술 저장고 ‘화하제일교’(華夏第一窖)이다. 두강조주유지공원(杜康造酒遺址公園)과 짝지어 중국 최초의 주류박물관으로 꼽히는 이 저장고는 최고 1t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술단지 2만여 개를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석혈보동(石穴寶洞)이라고 부르는 현무암층에 판 술 저장 구덩이도 이 회사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하남주창에서 볼만한 장관은 이 회사가 “아시아 최대”라고 자부하는 지하저장고 ‘화하제일교’(華夏第一窖)일 것이다. 두강조주유지공원(杜康造酒遺址公園)과 짝지어 중국 최초의 주류박물관으로 유명한 이 저장고는 1만6천여㎡ 면적에 최고 1t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술단지 2만여 개를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안내자는 현무암 지층의 이 일대가 “온도, 습도, 광도, 통풍도 등 모든 면에서 원주(原酒)의 숙성과 저장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자랑한다. 다른 주창과의 차별점은 원주가 각기 다른 독특한 조건을 지닌 구덩이별로 저장된다는 것. 이 구덩이들은 주창이 성립하던 1960년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데, 어느 구덩이에 술을 보관하느냐에 따라 술의 품질과 특징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예로부터 술 전문가들은 “이 구덩이들을 석혈보동(石穴寶洞: 돌구멍으로 된 보물 구덩이), 저장된 술을 ‘액체 황금’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남두강의 대표 브랜드인 ‘주조(酒祖)두강’에는 숫자로 교구(窖區)가 표시된 것이 있는데, 이는 교구별로 저장된 원주의 숙성 연도를 뜻한다. 주조두강 계열 고급주는 저장고에서 5년 동안 더 숙성된 뒤 시중에 출고된다고 한다. 필자가 방문한 날을 기준으로 최초 출고일을 7일 앞둔 2014년 입고 술항아리를 관리표상에서 세어보니 모두 316개였다. 항아리 용량을 최대 1t으로 치면 최대 316t이다.

두강주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두강조주유지공원은 주창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주신(酒神) 두강을 기념하는 묘원, 사당, 우물 등 복원 유적과 이선교(二仙橋), 칠현유지 등 두강촌을 무대로 숱한 술 이야기를 남긴 위·진 왕조 시대의 죽림칠현(竹林七賢) 관련 기념물도 세워놓고 있다. 술 애호가라면 한 번쯤 가볼 만한 곳이다.

공원에는 두강하를 재현한 연못과 두강천(泉)이라고 이름한 우물이 있다. 미네랄이 풍부한 광천수가 나온다는 샘물인데, 두강주의 빼어난 술맛의 근원이라고 한다. “물은 술의 뼈(酒之骨)이다. 하늘이 준 품질의 두강 광천수는 두강주를 빚는 데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뛰어난 조건을 제공해준다”는 설명이 자랑스레 붙어 있다.

두강하에 서식하는 신기한 오채원앙새우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다섯 빛깔을 낸다는 이 새우는 암수 두 마리가 서로 껴안고 함께 움직이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일까? 두강하에 사는 오리들은 노른자가 두 개인 쌍알을 많이 낳고, 주민들 가운데서도 이란성 쌍둥이가 많았다고 한다. 이 모두가 미네랄이 풍부한 물과 그 물을 마시고 사는 오채원앙새우와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두강이라는 이름은 중국인이 술의 조상으로 여기는 전설상의 인물에서 처음 나왔다. 아득한 옛날, 두강이라는 젊은 목동이 뽕나무 구멍에 보관한 밥이 발효되어 생긴 액체를 맛보고 술을 발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두(杜)는 주(周)나라 이후에 생겨나 춘추전국시대에 계통을 갖추기 시작한 성씨이므로 원시시대와는 관계가 없다. 현대 학자들은 춘추전국시대 이후 두씨 성을 가진 어떤 뛰어난 주조 기술자의 존재가 두강주 명성의 시발이었을 것으로 본다. 아무튼 두강은 중국 술의 할아버지라는 정통성, 조조의 ‘단가행’이 만든 천고의 유명세 때문에 허난성 두강과 산시성 백수(白水)두강 간에 치열한 원조 다툼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두강을 찬양한 문인은 역대로 매우 많다. 그 가운데 백거이, 소동파, 원호문 등 대시인들이 유명하고, 일화로는 단연 유령(劉伶)의 전설이 재미있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유령은 술 마시다 죽으면 그 자리에 바로 묻으라고 하인에게 곡괭이를 메고 따르게 했다는 전설적인 술꾼이다. 술 실력을 자랑하던 유령은 하늘에서 내려와 술집 주인으로 변신한 주신 두강이 “한 잔에 맹호가 취하고(猛虎一杯山中醉), 두 잔에 바다 용도 잠든다(蛟龍兩盞海底眠)”며 인간으로서 석 잔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자극하자, 단숨에 석 잔을 들이켜고는 3년을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두강공원의 이선교는 유령이 무덤에서 일어나 두강과 함께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것을 기념해 마을 사람들이 놓았다는 다리를 되살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슬픈 시인도 있다. “벼슬은 반갑지 않다. 다만 두강이 소중할 뿐”(不樂仕宦 惟重杜康)이라며 두강촌에서 두강과 더불어 난세를 타넘은 완적(阮籍·210~263)이다. 그는 당대 제일의 문사이면서도 권력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좋은 술이 많다는 어느 병영의 보병교위로 자원해 갔다. 그런 그를 친구들은 완보병(阮步兵)이라 불렀다. 완보병은 종종 울분에 차면 수레를 타고 말이 가는 대로 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수레가 멈추면 그 자리에서 통곡하다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실컷 울고난 가슴을 어루만져준 해우물(解憂物) 또한 두강이었으리라.

글·사진 이인우 선임기자 iwlee21@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