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 끝 물막이’ 와당에 마음을 빼앗기다

서울의 작은 박물관 ⑳ 종로구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

등록 : 2020-01-1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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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당에 빠진 ‘검사 유창종’, 본격 수집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 뒤 다시 모아

변호사 개업 뒤 2008년 박물관 건립

중국 전국시대~조선시대 유물 망라

기와지붕 여기저기에 설치된 건축재에도 옛사람들은 온 정성을 다했다. 기와를 입혀 내려온 그 끝을 막는 막새 하나에도 액을 막고 복을 부르는 상징을 새겼다.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 부귀영화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글자 한 자 무늬 하나 허투루 짓고 새기지 않았으니, 그 정성이 지금까지 이어지나보다. 유금와당박물관에 전시된 와당에 반했다.

유금와당박물관 전경.


검사, 와당을 만나다

유금와당박물관 관장 유창종씨와 와당(지붕에 기와를 입혀 내려온 끝을 막는 막새)은 1978년 충북 충주시에서 처음 만났다. 삼국시대의 기와 파편과 그의 만남은 우연 같은 필연이었다.

유금와당박물관 전경.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잎이 여섯 개 달린 작은 연화문 수막새였다. 그것은 와당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에게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삼국 와당의 특징이 하나의 와당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었다.

충주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거쳐 신라의 영토가 된 충주는 삼국의 각축장이자 삼국 문화의 접경지대이기도 했다. 역사의 단층이 쌓인 세 나라 와당 문화의 집약체가 그가 본 연화문 수막새였다.

당시 그는 충주의 향토문화 애호가들과 함께 예성동호회(후에 예성문화연구회로 이름을 바꾼다)를 만들었다. <월간조선> 1980년 7월호에 그의 기사가 소개되면서 ‘기와 검사 유창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당시 그는 검사였다.

‘기와 검사 유창종’의 관심은 와당의 뿌리였다. 그래서 중국의 와당을 공부했고,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와당 문화도 섭렵했다.

그 과정에 알게 된 일본 사람 이우치 이사오의 <조선와전도보> 전집을 구입해 그 책에 담긴 도록을 보면서 한국 기와의 우수성에 감탄했다. 비록 책을 통한 만남이었지만 ‘기와 검사 유창종’과 이우치 이사오의 만남은 훗날 유금와당박물관의 문을 여는 데 큰 구실을 하게 된다.

이우치 이사오는 소장 유물 일부를 우리나라에 기증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88년 이우치 이사오 기증 와전실을 만들게 된다. 당시 유창종씨는 조선총독부 건물이던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선, 일본인이 기증한 우리의 기와 유물 와전실을 보는 우리 후손의 느낌은 어떨까 생각하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유금와당박물관을 세우다

1978년부터 와당을 수집해오던 그는 2002년 소장품 1873점을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창종 기증실과 이우치 이사오 기증실이 나란히 있다.

그리고 그는 2003년 공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됐다. 공직의 월급보다 수입이 많아진 그는 다시 와당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이우치 이사오의 아들 이우치 기요시와 연이 닿아 그가 소장한 한국의 와전을 구입하게 된다.

국내에 형성된 가격에 비해 턱없이 비싼 일본 시장 가격을 절충하는 과정에 국내외 골동품 업계 사람들과 지인들의 중재가 있었다.

2005년 이우치 기요시의 소장품을 인수한 유창종씨는 유물의 활용 문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이미 기증한 유물도 전부 전시를 하지 못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은 추가 기증에 조심스러운 의견이었다.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체에도 타진했으나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유창종씨는 부인과 상의 끝에 직접 박물관을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남은 재산을 털어 박물관을 건립했다. 부부는 박물관을 운영하며 노후를 즐기기로 했다. 유금와당박물관은 2008년 그렇게 문을 열게 된다.

유창종씨가 와당을 수집하는 동안 패션 디자인과 복식미학을 전공한 부인 금기숙(유금와당박물관 공동관장)씨는 도용(순장 풍습이 있던 시절 사람 대신 무덤에 묻던 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을 수집했다. 박물관 이름에 붙은 ‘유금’은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만든 것이다.

유금와당박물관에 가면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우리나라의 와당과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와당을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처음 제작돼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파된 기와 문화의 1차 전성기는 중국의 전국시대, 2차 전성기는 중국의 진나라와 한나라, 3차 전성기는 우리의 통일신라시대라는 설명을 듣고 그 차이를 비교하며 전시품을 감상했다.


와당에 반하다

먼저 서전시실을 돌아봤다. 중국 전국시대 초기부터 한나라까지 유행했다는 해바라기 무늬 수막새에 머물던 눈길을 빼앗은 건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기 무늬 대형 반원 막새’였다. ‘기’는 용의 형상에 다리와 뿔이 하나씩 달린 전설의 동물인데, 그 형상을 와당에 새긴 것이다. 압도적으로 큰 와당이라서 ‘와당 왕’이라고 불린다. 진시황의 능과 행궁에 사용된 것이라고 한다.

중국 진나라 때 만들어진, ‘와당 왕’이라고 불리는 기 무늬 대형 반원 막새.

글자가 새겨진 막새는 한나라부터 유행했고, 글자는 한 자부터 스물한 자까지 있으며 장수와 부귀,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는 설명도 보인다.

서한시대에 만들어진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새겨진 수막새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생동감 넘치는 조각이 기운차고 정교하며 아름답다. 하늘과 땅을 잇는 역할을 한다는 학과 기러기 무늬가 새겨진 수막새도 눈길을 끈다.

동전시실은 우리의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이어지는 와당의 역사를 볼 수 있다. 그 한쪽에 중국의 와당 몇 점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는 사슴 무늬, 제나라는 나무 무늬, 연나라는 상상의 동물을 형상화한 무늬가 대표적이라는 안내 글 옆에 당시의 와당이 전시됐다. 수막새에 새긴 사슴 무늬가 선명하다. 명나라의 용무늬 수막새는 색을 입혔다.

(왼쪽)고구려의 도깨비 얼굴 무늬 마루 끝 기와. (오른쪽)통일신라시대의 도깨비 얼굴 무늬 마루 끝 기와.

글자가 새겨진 구름무늬 수막새, 도깨비 얼굴 무늬 수막새, 사람 얼굴 무늬 수막새, 두꺼비 무늬 반원 수막새 등 고구려 와당은 선이 굵고 웅건하다. 도깨비 얼굴 무늬 마루 끝 기와를 보는 순간 고구려의 웅건한 기상이 느껴졌다. 백제의 것은 회백색이 많으며 선이 부드럽고 유연하다. 신라 와당은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을 받았으며, 통일신라에 이르러 와당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통일신라시대 와당 전시품 앞에 선 유창종 관장은 아시아 와당 전성시대를 3차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중 통일신라가 세 번째라고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도깨비 얼굴 무늬 마루 끝 기와는 고구려의 그것보다 웅건하지 않지만 정교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고려시대 청자 모란무늬 수막새와 청자 넝쿨무늬 암막새.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청자 모란무늬 수막새와 청자 넝쿨무늬 암막새는 청자 유약을 입힌 청자 기와로 고려 건축의 화려하고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처음 보는 와당이었다. 작은 전시실 두 곳에 전시된 와당을 안내 글과 함께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 동안 와당에 반했다. 전시실을 나서며 다시 한 번 눈길을 준 건 42년 전 유창종 관장이 처음 보았던 연화문 수막새였다.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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