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동 골목길, ‘레트로’와 ‘뉴트로’의 사잇길

전유안 객원기자가 ‘중림동에서 본 세 가지 풍경’

등록 : 2020-01-1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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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떡 방앗간이 카페·공방과 섞이고

‘젊은층 유혹’ 식당과 노포들이 나란히

깊은 역사 속 새로운 이야기꽃 피어나

일부 “젠트리피케이션 우려” 목소리도

“찰칵”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골목의 정적을 깨웠다. ‘철거’ 붓질이 선연한 1950년대 슬레이트 집 창문으로 사람 흔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1978년 조세희 작가가 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 ‘낙원구 행복동’ 무대로 알려진 중구 중림동. 동네는 느릿하게 제 속도로 움직였지만, 소설 속 영수네 가족이 살았던 달동네 흔적은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중림동을 걸었다.


닻을 올린 ‘중림창고’


중림창고

동네 변화 중심에 ‘중림창고’가 있다. 낡은 창고와 한동안 공실로 놓인 공간을 개조해 만든 전시·판매·문화 복합공간이다.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다. 밝고 현대적인 외관이 눈에 띈다. 이 덕에 늦은 밤마다 인적이 끊겨 슬럼가를 연상시켰던 골목 분위기가 탈바꿈했다.

전시장, 서점, 기념품 등을 파는 가게, 사무실, 수선집 등이 잇따라 안에 들어섰다. 박지호 <아레나> 전 편집장이 운영하는 소규모 독서·커뮤니티 프로그램 ‘심야책방’과 ‘심야살롱’ 같은 문화 프로그램, 어반북스와 함께 만든 집단 ‘어반스페이스오디세이’(USO)가 전시, 공연, 책방 등 전반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운영한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중림창고와 1970년대 준공한 성요셉아파트가 나란히 위치한 중림동 서소문로6길

중림창고 맞은편 영화 세트장 같은 아파트가 바로 ‘성요셉아파트’다. 70년대 준공한 국내 최초 복도식 주상복합 아파트 1층엔 한때 고춧가루를 빻거나 가래떡을 뽑는 방앗간이 즐비했지만, 4~5년 전부터 카페와 공방 등이 나란히 자리하면서 세대가 섞이기 시작했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한 골목에 들어찬 풍경이다.

중림창고는 서울시가 서울역 일대에 조성한 앵커시설 8곳 가운데 하나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시가 나서서 주요 입지를 선정하고 일반주택과 건물을 매입한 뒤 문화생활이 소외된 지역마다 ‘문화거점’ 역할을 부여했다. 지속가능한 도시재생 기반을 닦는다는 목표로 시설 운영은 서울역 일대 지역 주민이 공동출자해 만든 도시재생기업(CRC) ‘서울 도시재생 사회적협동조합’과 ㈜요리인류의 컨소시엄(서울역 해피루트456)이 맡았다. 지난해 4월 출범한 ‘서울 도시재생 사회적협동조합’은 조합원 70%가 중림·회현·서계동 주민으로 구성된 도시재생기업이다.


‘레트로’와 ‘뉴트로’ 식당들

“인테리어 특이하네!” 11일 저녁 ‘외할머니댁’을 콘셉트로 내세운 고깃집 ‘국민회관’에선 스무 명 가까이 모인 2030세대의 신년회가 한창이었다. 1970~80년대 사용했을 법한 소반에 소시지 계란부침 같은 옛 도시락 반찬 등이 올랐다. ‘뉴트로’(새로운 복고)를 콘셉트로 내세운 중림동 새 식당들은 알음알음 찾아온 청년들 발길로 제법 붐비는 편이었다.

만리재 방향으로 새로 유입한 식당들

서울로7017과 가까운 서울역 서부교차로 대로변은 이처럼 고깃집, 리소토나 라면을 파는 식당, 커피 가게, 디저트 가게 등 새로 유입한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젊은층 입맛에 맞는 맛집 거리로 변했다. 반대로 중림동 삼거리, 서소문역사공원 방향 대로변은 닭 요리가 유명한 노포 ‘호수집’, 설렁탕을 파는 ‘중림장’, 매운 갈비찜이 유명한 ‘태정’, 닭칼국수 하는 ‘원조집’ 등 중림동 직장인들이 꾸준히 찾는 오랜 식당들이 굳건하다. 상인들은 “아직 걱정할 만큼 임대료가 치솟거나 방문객이 늘었다고 체감하진 않지만,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이 동네에도 나타날까봐 우려한다”고 세대를 가리지 않고 입을 모았다. 사람이 붐벼도 걱정, 붐비지 않아도 걱정인 이른바 ‘뜨는 동네’의 균형추는 어떻게 잡아야 할까. 더불어 생각해볼 일이다.

중림동에 굳건히 살아남은 옛 식당들


역사와 정취 따라 걷는 골목

서소문역사공원에 있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새로 자리 잡은 문화 공간과 노포와 맛집들을 모두 챙겼다면, 골목 따라 한두 시간 남짓 동네를 산책해보자. 중림동은 깊은 역사와 이야기를 품은 동네다. 1892년에 지은 약현성당(사적 제252호)은 국내 최초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외관이 아름다울뿐더러 언덕 위 풍광과 자연 속에서 휴식하기에도 좋다. 서소문역사공원도 지척이다. 조선시대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지’로 동학농민운동 지도자부터 시작해 천주교인들까지 순교한 터다. 지난해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어 지상엔 공원이, 지하엔 넓은 박물관이 들어섰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머물러 생각에 잠기기 좋다.

글·사진 전유안 객원기자 fingerwhale@gmail.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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